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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티렉스] '냉장고를 부탁해' 그거슨~ 혁명

입력
2015.05.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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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에 KBS 2TV에서 했던 ‘요리는 즐거워’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아직도 내 인생 최고의 요리 프로그램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이 프로그램은 1989년부터 3년 넘게 계속됐던 장수 프로였다. 진행자로는 탤런트 정영숙과 코미디언 고(故) 김형곤, 그리고 또 다른 코미디언 장두석이 차례로 거쳐갔다. 가장 재미있었을 때는 역시 김형곤 때였다. 요리 프로그램 진행자가 남자 코미디언이라는 점은 당시로선 혁명적이었다. 그때만 해도, 요리 프로그램은 앞치마를 두른 요리연구가 아주머니와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성 진행자가 조용조용, 고상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요리를 완성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요리는 즐거워’에는 요리연구가가 고정 출연하지 않았다. 일반 주부나 연예인이 등장해서 자신만의 요리 비법을 알려줬다.

편성도 파격적이었다. 보통 오전에 하던 요리 프로그램과 달리 저녁에 했다. 기사 자료를 찾아보니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보며 요리는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하자는 제작 의도 때문’이라고 한다. 26년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니, 실로 혁명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에피소드는 ‘맹구’ 이창훈씨가 나왔을 때다. 노총각이던 이창훈씨는 등산이 취미라고 소개하면서, 혼자 등산 가서 끓여먹는 잡탕찌개를 했다. 저음의 목소리로 점잖게 양파를 다듬고 파를 다듬던 이창훈씨가 갑자기 소시지나 햄을 손으로 뚝뚝 찢어서 찌개에 넣으면서 “여기는 산이니까”라고 ‘맹구’ 목소리로 변신하더니, 다시 요리를 설명하다가 “여기는 산이니까”라며 재료를 다듬지도 않고 마구 쓸어 넣었다. 태어나서 요리 프로그램을 보며 배가 아프도록 웃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1990년대 요리 프로그램 '요리는 즐거워'. 방송화면 캡처.
1990년대 요리 프로그램 '요리는 즐거워'. 방송화면 캡처.

사실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오늘 뭐 먹지?(올리브TV)’도 컨셉 면에서 보면 ‘요리는 즐거워’의 계보 아래 있는 셈이다. ‘차줌마’ 차승원을 탄생시킨 ‘삼시세끼 어촌편(tvN)’ 역시 ‘생활밀착형 요리 방송’이라는 면이 닮았다. 요즘 새롭고 핫하다는 요리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아이디어를 조금 보탰을 뿐 저 프로그램의 조상은 ‘요리는 즐거워’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 이런 내 생각을 싹 지워버린 혁명적인 요리 프로그램을 만났다. 바로 ‘냉장고를 부탁해(JTBC)’다.

일단 이 프로그램은 요리 프로그램의 틀을 모두 깼다. 요리를 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완성될 때까지 무슨 요리를 할지 알 수가 없다. 완성된 요리 역시 우리가 잘 아는 교과서적인 요리는 아니다.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재미는 ‘대결’ 구도다. 요리 고수들의 불꽃 튀는 대결도 흥미진진하지만, 그걸 평가하는 사람이 진지한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이 진짜배기다. 지금까지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출연자를 평가하는 방식에는 정말 질려버렸다. 그런데 여기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가진 요리 비전문가의 입맛에 승자가 결정된다. 그래서 만화가 김풍 작가가 유명 셰프 샘킴을 연달아 꺾는 대이변이 나온다. 고급 요리, 엄청난 기술보다도 출연자의 취향저격으로 살짝 깊은 맛을 첨가하는 ‘영리함’이 승리에 결정적이다.

그래서 머리 좋고 센스 있는 홍석천이 선전하고, 우직하게 요리하면서 승패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미카엘 셰프가 다소 고전한다. 아주 영리하게 대결을 하는 정창욱 셰프를 ‘맛 깡패’라고 표현한 대목은 정말 박수가 나온다.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전문 셰프들의 요리가 차원이 다르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도 진행자 정형돈이 ‘초딩 입맛’임을 강조하며 김풍 작가를 극찬하거나 모델 이현이가 김풍의 요리에 신음 소리를 내버리는 장면은 그야말로 신선했다.

사실 처음에 프로그램 소개만 봐서는 ‘냉장고 속 재료로 할 수 있는 요리를 알려드리는 생활 정보 프로그램’ 같은 느낌이었다.

첫 회의 진행 방식도 다소 어색했다. 승자 쪽 출연자만 음식을 모두 먹고, 패자 쪽 출연자는 구경만 하는 방식은 보는 내내 불편했다. 그런데 제작진은 이 방식을 금세 수정해서 요리를 모두가 맛볼 수 있게 바꿨다. 또 특별한 역할이 없는 여성 고정출연자들을 과감하게 뺀 것도 신의 한 수 였다(하필 이때 미리 빠진 고정출연자 중에는 이후 논란의 중심에 선 예원도 있었다).

도중에 추가로 이원일 셰프와 박준우 기자가 셰프 군단에 들어오면서 출연자가 8명으로 맞춰졌고,전체적으로 총 4팀의 1대 1 대결이 벌어지는 틀이 확립되면서 안정감이 생겼다. 스포츠 중계 전문가인 MC 김성주가 요리 진행 상황을 중계하는 것이나 출연 셰프들의 연승 연패 분석, 천적관계 해설, 시드 배정 같은 건 스포츠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은 재미까지 준다.

사실 결정적인 약점이 예상되긴 했다. 출연 셰프들이 너무 바쁘다는 거다. 최근 방영분에는 중간중간 일부 셰프들이 개인 사정으로 자리를 비웠는데, 그걸 중식요리 대가 이연복 셰프의 특별 출연으로 메워서 공백을 잊게 했다. 30년 넘게 요리한 대가가 흔쾌히 나올 정도라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게 손해 볼 것 없다는 인식이 생겼다는 것 아닌가. 이쯤 되면 인정. 나는 실로 혁명적인 21세기 요리 프로그램을 만난 게 확실하다.

이 프로그램의 ‘강력한’ 힘을 느낀 경험이 또 하나 있다. 그 동안 요리 프로그램을 멍하니 시청만할 뿐 거기에 나온 요리를 실제로 해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던 내가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고 움직이고 말았으니. 그건 바로 김풍의 ‘와풍 주니어버거’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 게 나만은 아니었나 보다. ‘와풍 주니어버거’는 네이버에서 ‘냉장고를 부탁해’를 치면 나오는 연관검색어다.

제작진에게 부탁을 하나 하자면, ‘냉장고를 부탁해’를 지나치게 자사 다른 프로그램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아주시길. JTBC 드라마 ‘순정에 반하다’에 나오는 탤런트 정경호가 냉장고 들고 나와서 (여자친구로 알려진) 소녀시대 수영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건 ‘초딩 취향’의 시청자로서 매우 실망스러웠다. 게다가 3월 30일 ‘비정상회담’에 김소연이 게스트로 등장한 데 이어 4월 초엔 2주 연속으로 ‘냉장고를 부탁해’에 정경호와 윤현민이 나와서 ‘순정에 반하다’를 홍보한 건, 나로선 3주 동안 ‘월요일의 빅재미’를 큰 부분 빼앗긴 것 같아서 좀 해도 너무했더랬다.

<냉장고를 부탁해>

JTBC 매주 월요일 밤 9시40분 방송

전문 셰프와 요리에 관심이 높은 출연자들까지 총 8명이 매회 새로운 대진을 짜서 일대일 요리 대결을 펼친다. 대결은 두 명의 게스트 집에서 직접 가져온 게스트의 실제 냉장고 속 재료를 갖고 15분간의 제한시간을 두고 이뤄진다. 승자는 요리를 먹어 본 냉장고 주인이 결정한다.

★시시콜콜 팩트 박스

1. ‘냉장고를 부탁해’가 요즘 예능 프로그램 중에 제일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JTBC는 이 프로그램을 ‘시사교양’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2. 셰프 군단 출연자 나이가 문득 궁금하다면. 최연소는 박준우 기자(1983년생)다. 그 다음이 미카엘 셰프(1982년생), 정창욱 셰프(1980년생), 이원일 셰프(1979년생), 김풍 작가(1978년생)다. 적당한 관록과 유연성, 거기에 매력을 동시에 갖춘 30~40대 셰프 군단이 있었기에 이 프로그램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3. 4월27일 기준 ‘냉장고를 부탁해’의 시청률은 3.9%(닐슨코리아)다. 화제성에 비해서는 작은 수치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잘 나간다는 증거는, 언제부터인가 슬쩍 S전자의 최신냉장고가 스폰서로 붙었다는 것 아닐까.

방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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