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기보다 베풀기에 익숙한 사회

약자에 필요한 것은 스스로의 자존감

배려하여 동행하는 5월이 되었으면

엊그제 ‘나비 소년’ 뉴스를 접했다. 캐나다 어떤 소년의 이야기였다. 14세 아이는 선천성 피부 손상과 성장 장애를 앓고 있다. ‘Butterfly Child’라는 희귀병으로 30세를 넘기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움직이기조차 힘든 그는 매일 꿈 속에서 아이스하키 선수가 된다. 사연을 알게 된 어느 아이스하키팀이 그를 정식 조언자로 스카우트했다. 앞으로 팀원들과 함께 다니며 조언을 하게 됐다. 소년은 급료와 기부금 등을 모아 환우(患友)들과 함께 사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회사 근처 모 은행에 들를 때면 한 청년 도우미가 언제나 문 앞에서 고객을 맞는다. “어서 오세요”라며 안내하고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하는 그의 말투가 퍽이나 이상했다. 그는 딱 두 마디만 했다. 무성의하다는 느낌도 있었고, 고객에게 장난을 치는 듯한 인상도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됐다. 그에겐 선천적 지체장애가 있었다. 이후 그 은행에 들를 때마다 어눌하지만 진심이 담긴 그의 말투가 듣기 좋고 기억에 남는다.

앞서 ‘나비 소년’ 경우 우리의 상황이라면 그 모습이 조금 다를 듯하다. 독지가가 나타나 치료비를 대겠다거나, 익명의 성금봉투가 배달되었을 것이다. 유명 병원이 무료 입원을 제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의 꿈을 좇아 동행하는 데 나서는 일은 생각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베풂’에는 적잖게 익숙하지만 ‘함께’ 하기에는 여전히 망설이는 모습이다. 장애인 도우미 청년을 정식 직원으로 채용해 떳떳이 고객 앞에 세울 수 있는 그 은행에 애정이 쏠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직장에 장애인 고용비율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지만 공공기관조차 이를 지키지 않는다. ‘함께’하지 않는 대신 금전으로 ‘베풂’을 실현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경제적이든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존감(自尊感), 즉 자신에 대한 신뢰일 것이다. 그래서 ‘베풂’과 ‘함께’는 다르다. 베푼다는 것은 베푸는 쪽의 생각과 입장에 중심이 쏠려 있다. 베풂을 수용하는 쪽으로선 베풀어 주는 쪽에 대해 고마움은 갖게 되지만 스스로 행복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자신에 대한 신뢰감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함께한다면 그 반대가 아닐까. 물론 아이스하키팀이나 은행으로선 어느 정도의 불편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약자의 입장에선 상당한 자존감을 유지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베풂’보다 ‘함께’가 더 필요하고 훨씬 효과적인 이유다.

얼마 전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점심시간에 교사가 교내 급식비를 내지 못한 학생들을 공개적으로 다그친 일이 회자됐다. 학생들 앞에서 베푸는 부모와 베풂을 받는 가정을 적나라하게 구분해버렸다. 그 교사는 그 동안 베풀어 왔던 모든 것들을 허사로 돌리고,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을 만들어 버렸다. 학생들이 함께 점심을 먹게 하여 모두의 자존감을 지탱시켜 주고, 베풂을 주고받는 부모의 구분을 학생은 물론 교사와 학교조차 모르게 하는 선진국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평범한 사회적 약자의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장애인의 문제에 이르면 ‘베풂’과 ‘함께’의 차이는 더욱 크다. 지난 주말 어떤 단체가 장애인다문화가정과 함께 조그만 운동회를 갖는 일에 끼었던 적이 있었다. 그 단체가 운동회를 베풀어주는 행사가 아니라, 정기적으로 함께 어울려 부대끼는 자리였다. 다문화가정이고 장애인이라면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임이 분명하고, 그들 스스로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충분히 자존감을 느끼고 있었다.

5월이다. 어제 근로자의 날을 시작으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등이 이어진다. 석가탄신일도 있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베풀 것을 요구하고 있다. 베풂을 주고받는 일은 물론 좋은 일이다. 나아가 함께하는 일이라면 더욱 좋은 일이다. 상대방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 그것은 배려다. 5월은 함께하고 배려하는 달이다.

정병진 논설고문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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