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체질개혁 전기로 만들어야

‘나’가 빠진 분노만으론 개선 안 돼

모두의 공범 인식이 정직한 출발점

진도 팽목항에 노란리본과 풍경이 바람이 흔들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세월호 앞에선 말을 잃는다. TV로 지켜보던 순간의 놀람, 안타까움, 허탈, 분노, 슬픔만이 마음 밑바닥에 뒤엉켜 가라앉아 있다. 1년 세월에도 그것들은 응고되지 않고, 툭 건들면 다시 떠올라 가슴 속을 난기류처럼 부유한다. 아마 오래도록 그럴 것이다. 희생자 대부분이 어린 학생들이므로.

고(故) 박완서 작가가 산문집에 썼다. 스물여덟 아들을 사고로 잃은 참척(慘慽)의 고통을 견디면서. ‘… 어미의 배를 빌려 태어난 이 땅의 아들 딸들아, 제발 죽지만 말아다오. … 설령 네 목숨과 지상의 낙원을 바꿀 수 있다 해도 네 어미는 결코 그 낙원에 못 들지니.’

250명이나 되는 그 많은 자식들의 죽음을 본 그날, 이 땅의 부모들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똑같이 아이 키운 입장에서 남의 일 같지 않아 무서웠고, 한편으로 내 아이가 아니어서 가슴 쓸어 내린 이기심이 부끄럽고 괴로웠을 것이다.

모든 죽음은 사회적이다. 아이가 통학버스에 치어 죽었어도, MT에서 천장이 무너져 죽었어도, 밤 늦은 골목에서 폭행당해 죽었어도, 집에서 모진 학대로 죽었어도. 사회구조와 무관한 죽음이 없고, 사회적 의미를 던지지 않는 죽음이 없으며, 그리하여 사회가 책임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죽음은 없다는 뜻이다. 하물며 세월호에서야.

여론에 떠밀린 모양새긴 해도 배는 어떻게든 인양될 것이다. 특별법 시행령도 워낙 적반하장이어서 끝내 그대로는 못 갈 것이다. 사고의 직접원인과 근인(近因)은 대체로 정리돼 있다. 구속자 154명은 예전 공안몰이 빼면 단일사건으론 최대일 것이다.

남은 건 ‘대통령의 7시간’으로 상징되는 국가시스템의 부실을 드러내 보다 근원적인 책임을 묻고 개선을 강제하는 것이다. 정부의 무능은 어차피 그 연장선상이다. 급한 조치들은 그럭저럭 진행돼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작 세월호의 모든 논의과정에서 빠져있는 핵심이 있다. 바로 우리 모두의 ‘나’다.

우리 모두는 모른 체 하고 있을 뿐이다. 세월호의 진짜 원인을 알면서도.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살 궁리를 찾은 선장 선원들, 번거로움 피하려 대충하려던 관제센터 근무자들, 선뜻 못 나서고 구조흉내만 낸 해경들, 무리하게 밀어 싣고 화물 결박비용까지 아끼도록 한 경영ㆍ관리자들. 친분과 잔돈푼에 낡은 배 구입과 부실증축을 돕거나 눈 감아준 정치인ㆍ공무원들, …. 일이 다르고 상황이 다를 뿐 일상에서 늘 대하는 우리의 모습이자 내 모습이 아니던가.

원칙과 규정대로가 고지식함과 무능으로, 편법과 요령이 융통성과 능력으로, 돈과 이해로 얽은 안면이 사회성과 인간성으로 변치된 사회에서 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대형사고란 별게 아니다.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긴 작은 변칙과 융통성, 편의 봐주기가 겹친 결과물이다. 500명 넘게 숨진 삼풍백화점 붕괴도 몇 푼 더 남기자고 철근심 몇 개 빼먹은 게 원인이었다. 아마 세월호로 단죄 받은 이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왜 하필 내게만 이런 일이…”하며 억울해할 것이다.

그래서 분노만이 답은 아니다. 오히려 피해당사자 아닌 이들의 맹렬한 분노에 대해선 위험한 상상을 한다. 어쩌면 세월호에 관한 한 알리바이에 안도하는 비겁한 면죄의 심리가 깔려있지 않을까 하는. 나를 뺀 ‘재수없는’ 타자에 대한 질타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그렇게들 격하게 분노했던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대구지하철도 이젠 거의 잊혀졌다. 그러나 적어도 세월호만큼은 또 그렇게 잊혀져선 안 된다. 세월호를 두고두고 기억하는 방식은 나 자신도 가해의 공범일 수 있다는 부끄러움과 반성이어야 한다. 더뎌도 그게 우리가 안전한 사회로 한발 더 나아가는 정직한 출발점이자 유일한 길일 것이다. 미뤄둔 속내를 1년에 얹어 털어놓는다. 나 역시 하등 다를 것 없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박완서는 이 땅의 아들 딸들에게 당부하는 글에 굳이 한 문장을 더 넣었다. “남을 죽일 위험이 있는 짓도 말아다오”. 작가 또한 우리 모두에게 그럴 위험이 잠재해 있음을 보았을 터이므로.

주필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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