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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손 내밀고 웃음 짓고… 4월의 상처가 조금씩 아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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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손 내밀고 웃음 짓고… 4월의 상처가 조금씩 아문다

입력
2015.04.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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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후유증 겪는 이웃들 위해 '치유공간 이웃' 등 자발적 모임

추모 음악회·분향소 찾아가 봉사, 올 상반기엔 '소생길' 조성 추진도

2일 오후 안산 와동 '치유공간 이웃'에서 단원고 2학년 10반 권지혜양의 생일모임이 열렸다. 모임 시작 전 지혜양의 중·고등학교 친구들이 지혜양의 생전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과 물품들을 바라보고 있다. 치유공간 이웃 제공
2일 오후 안산 와동 '치유공간 이웃'에서 단원고 2학년 10반 권지혜양의 생일모임이 열렸다. 모임 시작 전 지혜양의 중·고등학교 친구들이 지혜양의 생전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과 물품들을 바라보고 있다. 치유공간 이웃 제공

2일 저녁 경기 안산시 와동의 4층짜리 건물 3층은 50여명의 특별한 손님들로 북적댔다. 이날은 하늘로 떠난 단원고 2학년 10반 권지혜양의 생일. 가족과 지혜를 보고 싶어 하는 친구, 성당 지인, 자원봉사자 등이 모임 준비에 한창이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지혜양의 어머니 이정숙씨가 남편과 큰 딸을 데리고 살며시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딸과 마주하는 자리이기 때문인지 오전까지만 해도 ‘진상규명’을 외치며 광화문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이던 투사의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었다. 단정하게 차려 입은 이씨는 의외로 많은 손님들을 보고 크게 놀란 눈치였다. 이날 오전 삭발식에 참여한 고 구보현양의 어머니 김경애씨도 짧아진 머리카락을 모자로 감춘 채 딸 친구의 생일 잔치를 깜짝 방문했다.

행사는 지혜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꾸며졌다. 지혜의 장난기 어린 모습이 담긴 사진 50여장이 벽면을 수놓았고, 테이블 위에는 지혜가 생전 쓰던 지갑 다이어리 열쇠고리 등이 가지런히 자리 잡았다. 빨간색 동그라미가 가득한 영어 시험지에선 조심스럽게 정답을 맞추던 18세 소녀의 수줍은 얼굴이 떠올랐다. 지혜가 좋아하던 배우 이종석의 사인과 그가 보낸 꽃다발도 곁들여졌다. 진행을 맡은 정신과 의사 정혜신씨는 “오늘은 지혜 이야기만 실컷 하는 자리”라고 했다. “소녀시대 춤을 잘 춰서 소녀시대 노래만 나와도 생각난다” “꽃거지 흉내 낸다고 종이장미를 교복에 붙이고 다녔다” 등 친구들은 저마다 지혜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생일모임 한쪽 벽에 친구들이 지혜양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은 포스트잇들이 붙어 있다. 치유공간 이웃 제공
생일모임 한쪽 벽에 친구들이 지혜양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은 포스트잇들이 붙어 있다. 치유공간 이웃 제공

시종 즐거웠던 모임은 지혜의 눈으로 시인 이원씨가 쓴 편지를 낭독하는 순서가 되자 눈물바다로 변했다. 참석자가 다 같이 낭독한 편지에서 지혜는 “인사하고 오지 못해 미안해. 아빠 속상한 거 알지만 우리 집 가장이니까 힘주고 있어야 해”라며 미처 전하지 못한 말들을 풀어 놓았다. 이씨는 “진심으로 딸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큰 위안이 될 것 같다”며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곳은 ‘치유공간 이웃’이란 모임이다. 지난해 9월 단원고 희생자 가족과 친구, 또 참사 후유증에 힘겨워하는 안산 지역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쉼터다. 특별한 프로그램은 없다. 상처 입은 유가족과 시민들이 모여 132㎡(40평) 남짓한 마루 위에서 그저 밥을 지어 먹고 수다를 떠는 정도다. 함께 뜨개질도 하고 어깨를 주무르며 서로의 온기를 느낀다.

‘이웃’처럼 안산에는 정부가 아닌 민간이나 종교단체가 주도하는 공동체 치유공간이 늘고 있다. 참사 1년이 다가오면서 지역 전체가 집단 트라우마에 빠졌던 슬픔을 이겨내고 다시 희망을 찾으려는 시도다. ‘이웃’을 만든 이명수 대표는 “안산은 사람 냄새가 나는 도시”라며 “마을 공동체가 살아있기에 아직 희망은 있다”고 말했다.

공동체의 온전한 복원을 위해 1년 째 묵묵히 봉사하는 이도 있다. 택시기사 임영호(47)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숨진 단원고 학생과 선생님의 생일을 챙기고 있다. 참사 직후 희생자의 유골이 안치된 하늘공원과 장례식장을 돌며 유가족을 실어 날랐던 임씨는 이제 아이들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케이크와 꽃다발을 들고 단원고와 합동분향소를 찾는다. 일면식도 없으나 가슴 따뜻한 메모를 남기는 일도 잊지 않는다. 2학년 7반 성민재군 영정 앞에는 “천국에서 즐겁게 보내. 부모님은 12일째 도보행진 중이란다. 용기 불어 넣어주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적힌 메모가 놓였다. 그가 자비를 털어 챙긴 희생자 수는 벌써 116명이나 된다. 임씨는 “남들은 ‘미쳤다’고 빈정거릴지 몰라도 유가족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먹먹한 내 가슴은 위로가 된다”고 전했다.

안산 시민들에게 4월은 상실의 대명사가 됐지만 치유와 화해를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고 있다. 4일 안산시민 100여명은 ‘승화된 기억, 응원’을 주제로 안산문화예술의 전당에서 음악회를 개최했다. 추모음악회를 위해 6개월간 플루트를 배웠다는 박창덕(43)씨는 “그만 ‘잊으라’고 하지만 우리는 세월호를, 그 아픔을, 그 분노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0명의 연극부 선배를 떠나 보낸 단원고 2학년 임희진(17)양은 “공연을 통해 희생된 이들뿐 아니라 안산 시민 모두에게 큰 응원이 될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지난달 28일엔 안산지역 84개 시민단체가 대토론회를 열어 공동체 활성화 방안을 놓고 머리를 맞대기도 했다. 세월호를 기억하며 다시 일어서려는 지역사회의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상반기에는 합동분향소부터 고잔1동 주민센터, 단원고 2학년 교실 힐링센터로 이어지는 단원 ‘소생길(소중한 생명길)’도 조성될 예정이다. 안산을 방문하는 이들이 길을 따라 걸으며 당시 아픔을 되새기고 공감하자는 취지다.

음악회에 어르신 합창단으로 참여한 단원고 최진혁군의 할머니 김익희(72)씨는 “유가족과 우리 이웃들이 힘을 내는 모습을 보여야 먼저 간 손주도 덜 슬퍼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산은 서로에게 따뜻한 숨을 불어넣고 있다.

김현빈기자 hbkim@hk.co.kr

정준호기자 junho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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