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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리콴유 ‘부패와의 전쟁’

입력
2015.03.2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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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2월 15일 아침,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총리는 오랜 친구인 국가개발부장관이 밤사이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망인에게 달려갔다. 장관은 총리에게 편지를 남겼다. “명예로운 동양의 선비로서 제 실수에 대해 가장 엄격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미망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신은 부검되었고 약물에 의한 자살로 확인됐다. 그는 4~5년 전 부하직원에게서 두 차례 뇌물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해명을 위해 총리 면담을 요구했다가 거절 당한 뒤였다.

▦리콴유 총리는 1959년 취임 직후 ‘세금 전액을 공정하게 계산ㆍ분배하고, 한 푼도 새지 않도록, 모두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원칙을 공언했다. 총리 직속으로 ‘부패행위조사국(CPIBㆍ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을 운영했다. 값나가는 것은 모두 뇌물, 청탁의 대상에는 아내와 자녀 혹은 대리인도 포함, 업무 연관성에 대한 증명 불필요 등이 기준이었다. 수입 이상의 호화생활도 재판에서 뇌물수수의 증거로 인정됐다. 단속과 처벌의 간소화가 핵심이었다.

▦그는 자서전 일류국가의 길(From Third World To First)에서 깨끗한 정부가 강한 이유를 설명했다. “중요한 자리 공직자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다. 관직을 그만두더라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비상시를 위해 여분의 재산을 따로 챙겨두어야 할 필요가 없다. 고위공직자들이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을 때 모든 공무원들이 협동하고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이 점이 바로 공산주의와 대결해야 하는 다른 나라 정부와 우리의 결정적인 차이다.”

▦리콴유 총리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몫이다. 건국 초기 극심한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식의 권위주의를 뿌렸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언론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고, 집회와 시위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부(國父)로 국민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그의 부음을 접하고 먼저 생각난 것은 ‘깨끗한 싱가포르, 청렴한 공무원’이었다. 부패와의 전쟁이 선포된 우리는 김영란법과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진행형이다.

정병진 논설고문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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