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에는 한국 신문업계의 부수 확장경쟁이 지금보다 훨씬 치열했다. 경쟁사 확장 요원끼리 시비가 붙어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모기업(母企業) 지원을 등에 업고 백화점 상품권이나 자전거를 미끼로 독자를 빼가는 것도 모자라 살인 사건까지 유발한 재벌계열 신문사에 여론 화살이 집중됐다.

그런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경쟁 업체를 강하게 비난하던 다른 신문사 경영진을 사석에서 만난 뒤 깜짝 놀랐다. 그는 “우리 회사에도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시 신출내기였던 기자는 내심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라고 의아해했다.

20년이나 흐른 얘기를 꺼낸 건 이달 5일 발생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 피습사건 때문이다. 서울 대신 워싱턴에 있는 탓일 수도 있지만, 이 사건에 대한 기자의 단상(斷想)은 한국의 일반 정서와 다르다.

피습 사건 이후 대다수 한국인들은 귀중한 손님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다. 광인(狂人)의 칼에 자국 대사를 방치한 것에 미국 정부와 여론이 분노하고 그에 따라 한미동맹이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에 대한 이런 ‘부채의식’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원자력협정 개정 등 양국간 주요 현안에서 급작스런 ‘여론 쏠림’ 현상으로 작용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 사람들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의 미안함을 넘어서는 ‘부채의식’까지 가질 필요는 없다.

우선 미국 워싱턴의 주미 대사관 안호영 대사도 리퍼트 대사 못지 않게 위험에 노출되어 일하고 있다. 리퍼트 대사가 서울 거리를 새벽부터 누볐던 것처럼, 안 대사도 경호원 없이 워싱턴을 동분서주한다. 유난히 폭설 잦았던 올 겨울에는 아침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차에서 내려 인적 끊긴 눈 쌓인 거리를 내달린 경우도 있다. “근무지에서 위험에 직면하는 건 이례적이지 않고, 외교관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는 마크 토콜라 한미경제연구소(KEI) 부소장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토콜라 부소장은 2011년 주한 미국 부대사로 근무했을 정도로 한국을 잘아는 인물이다.

단정하게 한복을 차려 입은 중년 부인들까지 서울의 미 대사관 앞에서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비는 워싱턴포스트 사진에 감동 받은 걸까. 미 정부와 여론도 불행한 사고의 책임을 우리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있다.

대표 사례가 지난 6일 미 국무부 브리핑 장에서 벌어진 마리 하프 부대변인과 미국 기자 사이의 설전이다. 미국 기자가 ‘리퍼트 대사에 대한 경호가 불충분했던 것 아니냐’고 질문하자, 하프 부대변인은 “한국 사람들의 경호 능력은 아주 뛰어나다. 서울은 국무부에서 자체 경호팀을 파견해 미국 외교관을 경호할 만큼 위협이 크지 않다”고 반박했다.

그래도 미국 기자가 물고 늘어지자, 하프 부대변인은 상기된 표정으로 “내 말을 믿으라”고 일축했다. 또 “우리로서는 그 사람이 그 때, 그 장소에서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 알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견이나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에서 한국과 미국의 정서는 크게 엇갈린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미덕인 우리는 모든 현안을 뭉뚱그려 총체적으로 접근하는데 익숙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 이견을 피하려고 토론을 기피하면 불신을 면키 어렵다. 때로는 합의점 못지 않게 이견을 밝혀 두는 것이 상호신뢰를 구축하는 데 필수 조건이다. 미국 사회에서 ‘의견 불일치에 합의를 봤다’(Agree to disagree)는 표현이 중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지만 늘 의견이 같을 수는 없다. 리퍼트 대사 피습은 미안하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해야 할 말을 못할 만큼 우리 책임이 큰 건 아니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철환 워싱턴특파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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