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껏 놀아라.”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데 동네 할머니가 창밖으로 목을 내밀고 외치셨다. ‘해껏’이란 ‘해 넘어갈 때까지’란 뜻인데 우리는 할머니가 ‘한껏’을 잘못 말씀하신 거라고 생각했다. 해가 넘어가면 그만 놀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을 더 신나게 마음껏 놀라는 말로 오해한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고 우리는 한참이나 더 떠들고 놀았다.

놀이터라고 해서 별 것 없었다. 비가 오면 질퍽대는 공터에 삐걱대는 그네 두 개, 한겨울이나 한여름에는 너무 차갑거나 뜨거워서 손도 댈 수 없었던 야트막한 철제 미끄럼틀, 그리고 칸마다 다른 색깔이 칠해져 있는 정글짐이 전부였다. 가장 중요한 놀이기구는 공터였다. 그 빈 땅에서 우리는 오징어, 우리 집에 왜 왔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술래잡기, 구슬치기와 딱지치기, 사방놀이와 자치기, 심지어 축구와 야구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작은 놀이터에서 어떻게 그리도 많은 놀이를 했는지 놀랍다.

놀이터에는 오줌도 혼자 누기 어려운 꼬마부터 침 좀 뱉는 ‘노는’ 동네 형까지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아이들이 들락거렸다. 노는 동네 형들도 다양했다. 작은 아이들의 장난감을 빼앗아 가지고 놀다가 심드렁해지면 아무렇게나 던져주거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때리고 보는 못된 형이 있는가 하면, 그런 형들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주는 착한 형도 있었다. 누나들은 모두 다 예뻤다. 놀이터에는 위계질서가 있었으며 질서에 따른 책임과 권한이 있었다. 놀이를 선택한 형들은 놀이를 재밌게 만들기 위해 양보와 보호를 해야 했다.

이사를 가면 으레 놀이터에 가서 신고를 했다. 동네마다 놀이규칙이 조금씩 달랐다. 어떤 동네는 외발뛰기를 하다가 발을 바꿀 수 있는데, 어떤 동네에서는 발 바꾸기는 절대 금지 사항이었다. 새로 이사 온 아이가 자기가 살던 동네 규칙을 주장해봐야 소용없는 게 보통이지만 간혹 딴 동네 규칙이 수용되기도 했다. 아이들은 어떤 게 재밌는지 금방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어느 놀이터에나 있는 공통적인 제도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깍두기’였다. 놀다 보면 같이 놀기에 적당하지 않은 어린 동생이나 약한 친구들이 있기 마련이다. 자기들끼리만 놀고 싶지만 동생을 돌봐야 하는 처지이므로 규칙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또 힘도 약한 꼬마들은 놀이에 끼워주는데 온갖 규칙에서 예외를 시켜주었다. 동생들이 자랄수록 면제되는 규칙들이 줄어들었고 어느 정도 자라면 같은 동무가 되었다.

놀이터는 으레 다치는 곳이었다. 구르고 있는 그네 앞을 지나다가 머리가 부딪히기도 했고, 그네를 높이 구르다 뒤로 자빠지기도 했다. 정글짐에서는 한두 번 떨어진 게 아니다. 우리들은 다치면서 자랐다. 그러면서도 무탈하게 컸다. 놀이터는 사회를 배우고 규칙을 만들며 위험을 감수하는 곳이었다.

그렇다. 놀면서 사회를 배우고, 스스로 규칙을 만들며, 위험을 감수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의 결정적인 장점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동물 가운데 유년기가 가장 길다. 부모는 자식들을 오랫동안 돌봐야 하며 자식들은 성장하기 전까지 한참을 놀았다. 이에 반해, 네안데르탈인은 가능한 한 빨리 자라서 연장자의 자리를 채워야 했다. 그들에게는 유년기가 훨씬 짧았다. 유년기는 놀면서 배우고 사회성과 창의력을 개발하는 시기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에 비해 인지능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21세기의 현대인은 성인으로 독립하기까지 지난 세기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유년기는 극히 짧아지고 있다. 놀면서 스스로 터득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전국에서 2,000여 개 놀이터가 폐쇄될 위험에 처해 있다. 놀이시설의 안전을 핑계로 놀 수 있는 곳을 아예 막아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달려 있다. 그들에게 위험을 감수하면서 놀 수 있는 놀이터를 허락하자.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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