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필의 탐정이야기] 2. 로버트 갤브레이스의 '실크웜'

로버트 갤브레이스의 코모란 스트라이크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실크웜'을 재미있게 읽었다. 전작 '쿠쿠스 콜링'보다 서사의 집중도가 높아졌고 속도도 빨라졌다. 알다시피 갤브레이스는 조앤 롤링의 가명이다. 이 영국의 스타 작가는 그의 모국이나 북유럽 작풍보다는 미국 대박 작가들과 맞짱을 뜨기로 한 모양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미국식 범죄 추리소설의 패턴과 호흡을 거의 완벽히 구사하고 있다. 묘사는 거의 없고 배경보다는 사건 자체, 그리고 인물의 사연으로 거칠게 돌진한다. 몰입도로 보자면 그게 사실 잘 먹힌다.

로버트 갤브레이스의 '실크웜'

'실크웜'의 무대는 출판계다. 거물 작가와 출판인, 편집인이 등장한다.(한 슈퍼모델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소재로 한 쿠쿠스…는 영국 상류층 연예ㆍ패션계의 이야기였다.)

퇴물 취급을 받는 한 풍자작가가 실종된다. 업계의 추문을 소재로 한 그의 신작 원고도 함께 사라진다. 원고에는 모두가 알만한 출판인과 작가의 스캔들이 과장되고 비린내 나는 화법으로 까발려져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고, 그 작품으로 치명상을 입게 될 당사자들도 그 사실을 웬만큼 알고 있는 상황. 미발표 원고를 둘러싼 오해와 의혹과 갈등. 뿌리 깊은 애증과 음모들….

갤브레이스가 선택한 저 미로의 컨셉은 별로 새롭지 않다. 하지만 해리포터의 거대한 마법 세계를 펼쳐낸 판타지의 장인답게, 그는 뻔하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다만 내내 찜찜했던 건-실은 나로선 이게 결정적인데- 주인공인 사설탐정 ‘코모란 스트라이크’를 어떻게 봐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그는 마약중독자 엄마의 의문사를 계기로 명문대를 중퇴하고 군 수사관이 됐고, 영국 헌병대 특수수사대 에이스로 복무하던 중 동료를 구하다 오른쪽 다리의 절반을 잃었고, 의족을 단 채 제대해 탐정사무소를 열었지만 사무실 임대료도 못 낼 만큼 쪼들린다. 오랜 연인과 헤어져 사무실에서 먹고 자다 '쿠쿠스…' 사건을 해결하면서 일약 유명해져 사무실 위층 다락방을 얻어 살 정도는 됐지만,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만만찮다.

그리고 그는 로큰롤 명예의전당에 이름을 올린 갑부 록스타의 혼외 아들이다. 그는 그 아버지와 불화하지만(빚도 아버지에게 진 빚이다), 은수저 물고 나온 배다른 형제들은 언제든 그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헤어졌지만 아직 서로를 못 잊는 첫사랑 연인도 영화배우 뺨 칠만큼 예쁜 데다 세상이 다 아는 부잣집 딸인데, 그를 잊지 못하면서도 헤어지자마자 한 귀족과 결혼 날짜를 잡는다. 그는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

이제 그만 우려 먹어도 좋을 만큼 전형적(이라 썼지만 클리셰라 읽어도 무방)인 하드보일드 주인공이다. 이미 유명해진 선배 탐정들의 매력을 혼자 두루 구현(이라 쓰고 모방이라 읽는다)하려는 모양이다.

솔직히 해리 포터의 혈통도 엿보인다. 당장은 비루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상처 입은 왕자. 마법 세계에서 범죄의 도시로, 북유럽 신화의 숲에서 ‘비열한 거리’로 내려온 이 탐정이 해리 포터보다 덜 가진 게 있다면, 다리 한 쪽뿐이다. 어쩌면 더 가진 거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텔레그래프’는 이 책에 “후루룩 한입에 먹어 치우게 되는 책”이란 서평을 내놨다. 물론 찬사일 테고, 나도 흔쾌히 동의한다. 하지만 그게 꼭 찬사이기만 할까. 그의 문장은 미끈하지만 씹는 맛이 덜하고, 밀도의 강약 없이 대체로 밋밋하다. 구비를 깎아내고 콘크리트를 발라버린 4대강 유역 같은 느낌. 그는 이야기를 잘 만드는 작가이지,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 생각은 아무래도 안 든다.

이런 식의 비교는 반칙이지만, 가령 지난 번에 소개한 그의 대선배 영국 작가 P.D 제임스가 소망과 욕망에서 한 홈리스의 입을 빌려 “다른 사람의 친절을 지나치게 이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 못 됩니다. 사람들의 친절이란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 같은 것이지요. 처음에는 인심 좋게 콸콸 쏟아지다가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말라 버리기가 일쑤니까요.”라고 한 반면, 갤브레이스의 스트라이크는 가난한 의뢰인에게 “수임료가 싸지는 않습니다”라며 “박애주의에는 필연적으로 한계가 있었다”고 해버린다. 하드보일드 문체는 ‘건조’함을 미덕으로 삼지만, ‘무미’해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알려진 바 조앤 롤링의 이력은 P.D 제임스와 제법 닮아 있다. 젊어서 혼자됐고, 생계를 위해 데뷔했고, 장르소설을 썼고…, 여성 작가임을 감추고 싶어 했다는 점도 있다. 다만 그에게서는 작가로서의 고집보다는 직업인으로서의 승부욕이 더 커 보인다.

추리작가 로버트 갤브레이스의 승패는 그의 탐정 코모란 스트라이크에게 어떤 차별적 매력을 부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인기 있는 선배 탐정들과 다르면서 매력적인 무엇. 하지만 그는 아직 잘린 다리 말고는 특별히 보여준 게 없다.

나는 추리작가 갤브레이스의 승패가 우선은 ‘검증된(달리 말해 진부해진)’ 매력에 과도하게 기댄 스트라이크를 어떻게 차별화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넘치게 많은 하드보일드 주인공 군단에 고만고만한 한 명이 더 추가된들 대수로울 거야 없지만, 그래도 ‘판타지의 거장’아닌가. 마이클 코넬리가 라스트 코요테에서 그랬듯이, 그도 언젠가는 스트라이크의 가족사(특히 엄마의 죽음에 얽힌 비밀과 아버지와의 애증사)를 전면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이미 시리즈는 시작됐고, 스트라이크의 밑천은 웬만큼 보여줬고…, 모르긴 해도 그도 고민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재미있다. 덧붙여 그의 시리즈 전편을 타고 전개될 스트라이크의 두 갈래 연애도 군침 도는 이야기다. 매력적인 조수 ‘로빈’(그에게는 번듯한 직업을 가진 꽤 쓸만한 약혼자가 있다)과의 아슬아슬한 로맨스 라인과, 험난한 15년 연애 끝에 막 파탄은 났지만 아주 결딴나버린 것 같지는 않은 옛 연애 사이의 긴장.(사실 이 설정도 썩 새롭진 않다. 뭐 인생이란 게 다 고만고만하고 뻔하긴 하지만...)

사족/ '실크웜'의 코모란 스트라이크는 전작 '쿠쿠스콜링'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이미 유명해진 사립탐정이다. 50쪽도 안 되는 소설 1권 1장에만 '유명세'란 말이 무려 6번 나온다. 심지어 한 단락에 두 번 쓰인 곳도 있다. 잘못된 단어가 처음부터 반복되면 아무래도 실망스럽다. 아실테지만, '유명세'란 이 블로그 글에서 조앤 롤링에게 퍼붓는 투정, 즉 다른 작가였다면 그냥 넘어갈 일인데 유명 작가여서 비판받을 때 쓰는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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