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의 밀!당!]

정부가 국제유가 하락에 따라 석유류 제품 가격인하를 추진하는 가운데 9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에너지기술평가원에서 열린 '석유 및 LPG 유통업계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회의 시작에 앞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참석한 석유·LPG 유통협회와 소비자단체에 국제 유가 하락분이 국내 석유제품과 LPG 판매가격에 반영되도록 업계의 협조를 요청했다. 연합뉴스
기름값 내리라 압박하는 정부 앞에선 정유회사들의 자포자기

딱 4년 만입니다. 정부가 또 다시 기름값 인하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 2월 이명박 정부 당시 지식경제부 최중경 장관은 “내가 공인회계사다. 정유사들의 장부를 다 살펴서 기름값 원가와 유통 구조를 샅샅이 뜯어 보겠다”며 떵떵거렸습니다. 최 장관의 압박은 앞서 이명박 대통령이 1월 국민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면서 “기름값을 보면 주유소의 행태가 실로 묘하다”고 언급했는데요. ‘묘한 기름값’ 발언은 정유사들에게 기름값을 내리라는 표시였고, 지식경제부 공정거래위원회 등이 나서 정유사들을 압박했습니다. 국제 유가가 상승 추세였고, 기름값의 절반이 세금이라며 반발하던 정유사들은 지경부의 압박이 계속되고 공정위가 주유소 원적지 관리 담합 조사 카드까지 꺼내자 결국 4월에 휘발유와 경유 값을 한시적으로 리터(ℓ) 당 100원 내렸습니다. 최 장관의 장부 들여다보기는 별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기름 값 한시 인하 기간이 끝났지만 소비자들이 기름값이 내려가는 것을 체감하지 못한다는 여론이 커지자 최 장관은 이번에는 기름값이 비싼 상위 500개 주유소를 골라 주유소 장부를 또 뜯어보겠다고 선언하며 또 한번 압박했습니다. 같은 해 정유사들은 4,000억 원대 과징금을 맞았고 수익도 반토막이 났습니다. 그러나 기름값은 정유사를 마지못해 내린 3개월을 빼곤 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2015년 벽두부터 박근혜 정부가 또 한 번 기름값 인하를 압박하고 나섰습니다. 9일 산업통상자원부는 서울시 강남구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에서 석유ㆍLPG 유통협회와 소비자단체가 참석해 ‘석유 및 LPG 유통업계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서 산업부 채회봉 에너지산업정책관은 국제 유가 하락분이 국내 석유제품과 LPG 판매가격에 반영되도록 업계의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산업부 관계자는 “현재 국제 유가는 지난해 1월과 비교해 배럴당 50달러 이상 하락했다”며 “국내 휘발유 가격과 경유 가격도 지속적 하향세”라며 협조를 가장한 ‘압박’을 가했는데요.

정부는 통상 연초에는 업계, 업종 별로 신년 인사회를 겸한 간담회를 갖습니다. 업계의 애로사항과 건의 사항을 정부에 전달하는 성격입니다만 올해는 되려 정부가 업계에게 기름, 가스값을 내려달라 요청하기 위한 자리를 만든 셈이죠. 업계 관계자는 “간담회가 원래 다음주로 예정돼 있었는데 갑자기 이틀 전 밤에 연락이 와서 간담회에 참석해 달라고 했다”고 전했습니다. 게다가 이날 산업부는 기자들에게 8일 기준 서울시 관악구 내 휘발유 최고가격과 최저가격은 ℓ당 759원 차이가 있다는 ‘친절한’ 자료를 보내 줬습니다. 비싸게 파는 주유소는 충분히 기름값을 내릴 여유가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명분 쌓기 용으로 보입니다. 산업부 관계자는 “국제 유가 변동이 국내 가격에 반영되는 시기와 지역ㆍ주유소 별 규모에 차이가 있어 가격 인하에 따른 소비자의 물가 체감도가 들쑥날쑥”하다며 “같은 유종의 최고가격과 최저가격의 차이가 커 국내 유류제품의 가격을 낮출 동기가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산업부는 여기에 더해 3월부터 7대 광역시 내 구단위 휘발유, 경유, 등유, LPG 가격이 비싼 주유소와 싼 주유소 5곳의 가격 동향을 매주 보도자료로 배포할 예정입니다. 석유제품과 LPG 가격비교를 통해 업계의 가격경쟁과 유가 하락을 유도할 방침이라는 것인데요.

정부가 국제유가 하락에 따라 석유류 제품 가격인하를 추진하는 가운데 9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에너지기술평가원에서 열린 '석유 및 LPG 유통업계 간담회'에서 이원철 대한석유협회 선임본부장이 일일유가동향을 살피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참석한 석유·LPG 유통협회와 소비자단체에 국제 유가 하락분이 국내 석유제품과 LPG 판매가격에 반영되도록 업계의 협조를 요청했다. 연합뉴스

업계는 반발했습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4년 만에 또 인하압박 시즌이 돌아온 것 같다”고 허탈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4년 전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정유업계는 지금 사상 최악입니다. 이미 2,3년 전부터 불황이 닥쳐왔고, 비쌀 때 싸둔 기름 재고분이 가격이 곤두박질하면서 가만히 앉아서 1조~2조원 규모의 재고 손실분을 떠안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오죽했으면 업계 1위 SK이노베이션는 지난해 창사 이래 처음으로 신입 사원을 뽑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력 구조조정은 이미 했고, 다음 카드는 임금 삭감 카드밖에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2011년에는 정유업계는 글로벌 고유가 덕에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고 있었고, 정유업계 직원들은 두둑한 보너스와 주머니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니 당시에는 업계의 반발이 어느 정도 ‘배 부른 소리’로 비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업계는 “뒤질 테면 뒤져보고 때릴 테면 때려보라”는 분위기입니다. 내려가는 기름값에 대해 뾰족한 대책도 없이 두 손 두 발 다 묶인 상태인데 더 때려도 아픈 거 말고 있겠느냐는 자포자기 심정까지 느껴집니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석유공사 홈페이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내비게이션에 전국 주유소의 기름값이 실시간으로 검색 가능한 시대”라며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가격을 비싸게 받는 곳은 나름의 전략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고 서비스도 엉망이고 가격도 비싸면 그 주유소는 고객들로부터 외면 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차려진 ‘알뜰 주유소’도 경쟁자로 있는 상황에서 그저 돈 더 벌려고 비싸게 팔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인데요.

그러면서 업계는 유류세 얘기를 꺼내듭니다.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휘발유 판매 가격에서 세금 비중은 56%입니다. 1년 전(49%)보다 7% 포인트가 올랐습니다. 휘발유 가격이 ℓ당 1,300원이라면, 세금이 728원이 세금인 셈이죠. 업계 관계자들은 “기름값이 왜 이렇게 비싼가, 왜 국제유가는 내리는데 휘발유 값은 안 내리느냐는 여론의 화살을 정유사와 주유소에게 돌리려는 것”이라고 반발합니다.

정부가 문제 있는 기업과 기업의 영업 행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국민과 국민경제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그 만한 합당한 근거가 있을 때 박수를 받을 수 있겠죠. 그게 아니라면 정부는 박수 대신 신뢰를 잃게 될 것입니다. 잠시나마 여론의 비판을 벗어나기 위한 ‘꼼수’라면 더욱 그렇겠죠.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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