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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벗어날 수 있던 지옥… 소녀의 절규 잊혀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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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벗어날 수 있던 지옥… 소녀의 절규 잊혀진 듯

입력
2015.01.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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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 크고 교통 좋아 사용에 편리" 日, 68채 가옥 중 14채 위안소 낙점

자살 못하게 방문 앞 보초 세우고 입구 가로막아 도주 시도 원천 봉쇄

1930년대 일본 육군 위안소 가옥 14채가 위치했던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 지칭리 골목
1930년대 일본 육군 위안소 가옥 14채가 위치했던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 지칭리 골목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시의 최대 번화가 ‘쫑샨따다오(中山大道)’ 한복판에는 오래된 고층 건물 한 채가 우뚝 서 있다. 언뜻 보면 대형 백화점과 최신 쇼핑몰이 즐비한 첨단의 거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외양을 하고 있지만, 1930년대에는 이 곳도 우한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호텔이었다. 당시 아편쟁이, 비단장수, 화류계 종사자 등 중국 각지에서 돈을 좇아 모여든 이들이 이 호텔을 중심으로 터를 잡았다. 이 호텔의 역사적 진면목은 바로 뒤편에 늘어선 가옥들에 있다. 이 가옥들은 바로 80여년 전 일본 육군의 위안소가 들어섰던 아픔의 공간이다.

지난달 17일 지칭리(積慶里)라 이름 붙여진 위안소 거리를 찾았다. 동행한 두홍잉(杜宏英) 우한도서관학회 부연구원은 “지칭리라는 명칭 자체부터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설명했다. 지칭은 ‘좋은 일이 쌓이는 곳’이란 뜻. 그러나 이곳은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는 병으로 죽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생지옥과 다름 없었다.

일본군이 지칭리를 위안소 부지로 낙점한 이유는 시내 중심에 위치해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위안소 군의관을 지낸 일본인 야마다 세이키치(山田淸吉)가 1978년 펴낸 ‘우한병참’에는 “규모가 크고 교통이 좋아 사용에 편리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지칭리에는 2층짜리 가옥 68채가 있었는데 일본군은 이중 14채를 위안소 건물로 사용했다. 두 부연구원은 “위안부들이 자살하지 못하게 방문 앞에 보초를 세워두고 거리 입구를 철문으로 가로막아 도망을 원천봉쇄했다”며 “사실상 위안소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성병에 감염돼 죽는 것뿐이었다”고 비참한 실상을 전했다. 성병에 걸려 사망한 위안부가 어찌나 많았던지 지칭리 골목 한 쪽에 이들을 기리는 작은 공양탑을 세웠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우한시 쫑샨따다오의 80여년 전 전경으로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 바로 뒤편이 지칭리이다.
우한시 쫑샨따다오의 80여년 전 전경으로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 바로 뒤편이 지칭리이다.

전체 건물 가운데 검진소와 목욕탕을 제외한 열두 가옥에서 280여명의 위안부가 수년간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 중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만 150명에 달했다. 인간으로서 존엄이 유린된 고통의 삶은 우리나라의 정신대연구소가 1992년 발간한 증언집에 생생히 기록돼 있다. 열네 살 나이에 일본군에 속아 지칭리까지 끌려온 홍애진 할머니는 하루 10명, 휴일에는 20명이 넘는 군인을 강제로 상대했다. 수시로 불임 주사를 맞고 불임약을 삼키며 버티는 생활이었다. 이봉화 할머니는 성적 수치심에 정신분열증에 걸려 3개월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8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곳이 일본의 위안소 건물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건물 곳곳에 남아 있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건물 2층은 5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지금도 그리 넓지 않은 크기인데 과거엔 20개 넘는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고 한다. 우한대학역사학원 중국경제학사회사연구소 박사연구생인 류원양(26)씨는 이제는 벽으로 막힌 자리에 어렴풋이 남은 미닫이문 흔적을 가리키며 “위안부를 닭장 속의 닭처럼 밀집해 수용한 증거”라고 말했다. 1~2층 사이에 일본군의 눈치를 보며 위안부 여성들이 밥을 해먹던 부뚜막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지칭리는 애써 찾지 않으면 과거의 상흔을 쉽게 찾을 수 없는 평범한 거리로 변해가고 있다. 위안소 건물 중 상당수는 10년 전 두 개 층이 더해져 번듯한 4층짜리 주거지로 탈바꿈했다. 70대 주민 왕춘예(王春葉ㆍ여)씨는 “30년 넘게 살았는데 이곳이 위안소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학자들이 지칭리를 방문했을 때였다”며 “먹고 살기도 바쁜데 과거의 역사까지 신경쓰긴 어렵다”고 말했다. 지칭리에서 평생을 보낸 80대 췐(權) 할아버지도 “나 같은 사람이 죽으면 지칭리의 의미도 곧 잊혀질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처럼 지칭리가 중국 사회에서 역사적 장소로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것은 중국에선 아직 위안부 문제가 과거사 재조명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쑤주량 상하이사범대 교수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이 20년 전부터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지만, 당국과 일반인의 관심이 여전히 부족한 탓이다. 일례로 중국에는 한국의 수요집회와 같은 시민사회의 자발적 역사재조명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지칭리를 유적지로 지정한다는 정부 차원의 계획도 아직은 없다. 류 연구생은 “중국은 유교사상이 강해 피해자가 음지로 숨어 들었고, 공산화 등 굵직한 역사를 거치며 비교적 미시분야인 위안부 문제에까지 눈을 돌리기 어려웠다”며 “매년 세상을 등지는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위안소 유적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말했다.

우한= 글ㆍ사진 김민정기자 fac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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