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6년 1월15일 청와대 연두 기자회견장.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경북 영일군에서 원유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매장량이 60억 배럴로 추정되며 ‘원유 대박’덕분에 한국 경제가 돈방석 위에 올라서고 국민의 세금 부담도 줄어들 것이라는 성급한 언론 보도도 이어졌다.

대한민국 산유국 꿈은 백일몽으로 끝났지만 ‘산유국=대박’등식은 40년이 흐른 지금도 유효하다. ‘셰일 원유’ 대박을 터뜨린 미국이 사우디 아라비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 산유국 반열에 오르면서 미국인의 씀씀이에 여유가 생긴 게 대표적이다.

땅덩이가 넓은 미국에서는 차가 없으면 꼼짝 할 수 없다. 식료품을 사려고 해도 차를 몰고 나서야 한다. 어느 미국 가정이나 연간 주행 거리가 최소 2만 마일(3만2,000㎞)에 달하고, 이를 위해 최소 800갤런(3,000리터)의 휘발유가 필요하다. 지난해 여름까지 갤런당 3.5달러이던 기름 값이 2.5달러로 내려간 걸 감안하면 미국 가정의 부담이 평균 800달러(2,800달러→2,000달러)나 줄었다. 가정마다 90만원 가량의 공돈이 생긴 셈이다.

하지만 ‘살기 좋아졌느냐’는 질문에 절반 이상의 미국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기름값 수치를 증거로 제시해도 “체감 경기가 좋아진 걸 실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나빠졌다”는 사람이 많다. ▦지난해 3분기 경제성장률이 10년 만에 최대인 5%에 달하고 ▦유럽과 일본을 훨씬 앞서는 데도 ‘경제를 망쳤다’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비난한다.

한국도 미국을 닮았다. 소비자물가가 0%대로 하락해 디플레이션이 우려된다는데도, 대다수 사람은 “물가가 너무 올라 걱정”이라고 대답하는 모양이다. 특히 농산물은 체감물가를 끌어 올리는 주범이다. 주부들은 수 십 가지 농산물 품목 가운데 전년 대비 오른 것에만 주목할 뿐, 내린 품목은 생각하지 않는다. 배추 무 고추는 내리고 양파 값이 유난히 오른 해에는 ‘양파 파동’, 고추 값만 오르면 ‘고추 파동’이 발생하는 식이다.

정부가 무능하고 속수무책으로 물가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비쳐지지만, 사실은 심리적 변수 역할이 더 크다. 또 이런 편파적 성향 때문에 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기는 늘 차가울 수 밖에 없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이웃이 실직하면 불경기지만, 내가 잃으면 불황”이라고 한 것도 이를 간파한 사례다.

대다수 국민이 체감하지 못해도 한국인의 구매력은 추세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구매력으로 평가한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12년 3만5,500달러였지만 지난해에는 3만7,683달러로 올라섰다.

체감 경기를 무리하게 살려내는 게 오히려 문제일 수도 있다. 외환위기 이후 국민이 체감 경기 회복을 실감한 경우는 딱 두 번으로 2000년과 2002년이다. 2000년은 ‘벤처거품’, 2002년은 김대중 정부의 과욕으로 초래된 ‘카드거품’ 시기다. 삼성카드, LG카드 등에 수 조원의 부실이 발생했고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김대중 정부 말년의 흥청망청 빚잔치는 후임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표현대로 경제를 절단 냈다.

2015년 을미년이 밝았다. 정부와 정치권은 이번에도 관성적으로 체감 경기를 살리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솔직해지자. 정부는 “여건상 체감 경기를 획기적으로 살려 낼 수 없고, 그게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해보라. 또 “자녀 세대를 위해 낡은 제도를 바꾸는 게 시급한 때”라고 설득하는 건 어떨까.

정부가 솔직해지면, 더 많은 시민이 ‘먹고 사는 일이 힘들지만, 지난해 번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재작년보다 늘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또 복지를 위해 세금 더 내고, 고용을 위해 조금씩 양보하자는 마음도 늘어날 것이다.

경제 성과에도 고전하는 오바마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경제도 정치만큼 국민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

조철환 워싱턴특파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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