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월간지에서 2015년 광복 70년을 맞이해 ‘김호기교수가 만난 우리 시대 지식인’이라는 기획을 시작했다. 1월호에서 첫 번째로 만난 이는 오랫동안 한국일보 기자로 일했던 소설가 김훈이다. 김훈과의 대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회의 약육강식’과 ‘자연의 약육강식’의 비교였다.

김훈은 자연의 약육강식이 생태계를 기본적으로 유지시킨다고 말했다. 사자가 얼룩말을 한 마리만 잡아먹듯이, 사자라고 해서 얼룩말 생태계 모두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와 달리 사회의 약육강식에선 돈이 사회 전체를 완전히 지배하고 복종시킨다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돈이 절대적 유일신으로 군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훈은 돈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공정한 게임’이 가져온 결과가 ‘공정한 약육강식’이라고 비꼬았다.

김훈과의 대화로 말문을 연 것은 2014년 올해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지난 1년 동안 사회 영역에서 내 시선을 끈 가장 중요한 두 사건은 ‘세월호 참사’와 ‘땅콩 회항’이었다. 두 사건의 기본 성격은 다르다. 세월호 참사의 요인이 정부의 미숙한 대처와 책임윤리의 실종에 있었다면, 땅콩 회항의 원인은 사회적 약자인 ‘을’에 대한 강자인 ‘갑’의 횡포에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땅콩 회항보다 훨씬 더 무거운 사건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땅콩 회항 사건에는 한 개인의 그릇된 인식과 행동을 넘어선 우리 사회 상층의 이른바 ‘갑질’에 대해 을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집단적 분노가 담겨 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두 사건을 관통하는 공통점이다. 그것은 생명과 인격의 가치가 경시되고 무시됐다는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와 땅콩 회항에 대한 여론의 반향이 컸던 까닭은 생명의 안전보다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이윤 추구를, 인격의 존중보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권력 행사를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건에는 우리 사회가 함께 살아갈 공동체의 최소 조건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분노가 있는 그대로 반영돼 있다. 그들이 놓인 자리가 기실 내가 놓인 자리라는 공감을 다수의 국민들은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보면 올해만큼 공동체로서의 우리 사회가 큰 어려움을 겪은 때도 드물다. 교수신문은 지나온 2014년 우리 사회의 특징을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일컫는, 고의적으로 옳음과 그름을 바꾸는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명명했지만, 동시에 공동체가 해체되고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쓸쓸하고 비감한 자각 또한 두드러진 한 해였다. 그렇다. 올해 우리 국민 다수가 목도한 것은 상처받고 찢겨지고 분노한 공동체로서의 대한민국이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런 일련의 상황 아래 점차 약화되는 사회의 회복 탄력성이다.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란 한 개인이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다시 튀어 오르는 능력을 말한다. 개인 심리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사회구조 차원에도 회복 탄력성은 존재한다. 문제는 언제부턴가 사회적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회복 탄력성이 갈수록 줄어들고, 그 탄력성이 발휘되기 어려운 임계점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점이다. 제대로 된 해법을 찾지 못하는 청년실업, 비정규직, 소득 양극화, 노인빈곤 문제 등은 구체적인 증거들이다.

이제 일주일이 지나면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2015년이 열린다. 광복에 담긴 역사적 의미는 새로운 국가와 사회의 건설이었다. 지나온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모두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공정한 약육강식이 아니라 공정한 상호배려를 실현할 새로운 국가, 새로운 경제를 모색해야 할 과제를 우리 사회는 안고 있다.

오래 전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느니라.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2015년 새해에는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를 새롭게 일구는, 고통 뒤에 기쁨을 안겨주는 사회의 회복 탄력성이 발휘되길 기대한다. 상황이 아무리 비관적이더라도 그런 희망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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