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 비약과 편견 가득한 ‘인상 재판’

여권 수세 탈출, 보수 결집 미소 짓지만

사회 우경화와 종북몰이로 퇴행 우려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 해산 심판 청구 선고가 열린 지난 19일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이정희 통진당 대표 등 피청구인쪽 변호인단이 심각한 표정으로 해산 판결을 듣고 있다. 신상순기자 ssshin@hk.co.kr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을 듯하다. ‘비선 실세’ 국정 개입 의혹으로 궁지에 몰린 국면을 탈출하기에 이보다 더한 호재는 없기 때문이다. 검찰이 박관천 경정의 1인극으로 결론 내린다 해도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모든 국민이 알아버린 터다.

종북세력 척결 명분은 보수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다. 박 대통령 지지율이 30%대로 추락한 이면에 보수층의 이탈이 크게 작용한 점을 감안하면 잃어버린 집토끼를 찾아오는 수단으로는 효과 만점이다. 통진당 해산을 기점으로 빼앗긴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되찾고 집권 3년 차의 드라이브를 거는 동력으로 삼겠다는 구상을 할 법도 하다.

음모론적 시각을 좀 더 확대한다면 헌재가 결정을 내린 시점도 석연치 않아 보인다. 헌정 사상 초유의 정당 해산 심판에 걸린 시간은 1년이 채 안 된다. 헌재 결정의 주요 근거가 된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법원의 최종 판단은 나오지도 않았다. 마지막 공판이 열린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9명의 재판관이 의견을 모으고 347쪽의 결정문 작성까지 마쳤다. 뭐가 그리 급했던 걸까.

헌재가 내놓은 법리적 논거를 보면 의구심이 더욱 짙어진다. 통진당은 민족해방(NL)계열이 다수다→이들의 과거 활동을 보면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했다→따라서 통진당은 북한식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게 논리의 얼개다. 어설프고 빈약한 삼단논법이다. 각 단계를 연결하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가설과 억측, 주관적 판단과 논리 비약이 넘쳐난다. 최고 재판기관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격이 떨어진다.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필요한 글과 발언만 가져와 끼워 맞췄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세계 헌법재판기관이 모인 회의체인 베니스위원회가 2009년 채택한 ‘정당해산 관련 지침’을 보면 헌재 결정의 오류가 분명히 드러난다. 가이드라인에는 국내 법률이 아닌 국제적 기준 충족, 헌법질서 전복을 목적으로 한 폭력 사용, 정당구성원 개별 행위로는 해산 불가, 비례성의 원칙, 현실적 위협에 대한 충분한 근거 등 5개항이 규정돼있다. 이에 따르면 헌재 결정은 국제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고 폭력 사용과 현실적 위협을 입증하지 못했으며 일부 구성원의 행동을 전체로 확대했다. 헌재가 이 지침대로 판단을 했다면 ‘통진당의 강령과 활동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한다고 볼 여지가 있으나 실질적 해약을 끼칠 구체적 위험성이 있다는 증거가 없어 해산할 수 없다’고 결정을 내렸어야 한다.

헌재 결정으로 현 정권은 당장의 정치적 이득을 얻었을지 몰라도 우리 사회는 더 많은 것을 잃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민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고 대표할 수 있는 정당을 통해 주권을 행사한다. 통진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은 한때 국민의 10%의 지지를 받은 공당이다. 헌재 결정으로 적지 않은 유권자가 정당의 자유, 정치적 결사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 받게 된 것이다.

사회 전반의 우경화 가능성과 함께 ‘종북몰이’가 더욱 기승을 부리지 않을지도 심히 우려된다. 당국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반대 세력에 종북 딱지를 붙이고 공안정국을 조성할 개연성이 높다. 신은미 토크콘서트장에서 고교생이 사제 폭탄을 던진 것과 같은 백색 테러가 벌어지고 극우 외곽단체들의 활동이 한층 극렬해질 소지가 크다. 당장 보수단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통진당 전체 당원 10만 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고 검찰은 고발장을 받자마자 수사에 착수했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 진보적 목소리가 위축되는 상황이다. 현대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양대 축이 생산적인 경쟁을 벌일 때 가장 선진적인 정치가 펼쳐진다. 진보가 부정되고 위축된 사회는 활력이 사라지고 퇴행적이 된다. 진보가 제대로 설 때 그와 경쟁하는 합리적 보수도 함께 설 수 있다.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유로 53년간 국교를 단절한 쿠바와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마당에 우리는 세계적 흐름에 얼마나 뒤처져 있는가.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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