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보느라 달을 잊는다, 견지망월

먼 곳 본질 감추려 눈앞으로 관심 돌려

찌라시 유출이 국가 흔든 토양 살펴야

일년에 한 번씩 어김없이 다가오는 게 연말인데 매번 난생 처음 맞이하는 것같이 낯설다. 이때쯤이면 사자성어(四字成語)나 고사성어(古事成語)가 언뜻 떠오르고 자주 들리는 게 아무래도 나이 탓이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란 말을 생각해 본다. 손가락을 보느라 달을 잊었다는 말이다. 어느새 달은 잊어버리고 손가락만 기억하게 되니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금언이기도 하다.

옛날 어느 불자가 고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고승은 스스로 글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실망하는 불자에게 고승은 진리와 문자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진리는 하늘의 달과 같고 문자는 우리의 손가락과 같다. 달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은 손가락이지만 그것을 통해야 달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을 들었더니 오매불망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반문했다. 불경만 읽고 외우느라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모습을 질타한 것이리라. 본질은 사라지고 주변적 모습에만 매달리는 세상에 대한 교훈이다.

또 다른 이야기를 생각한다. 1900년대 초 터키의 한 천문학자가 화성과 목성 사이에서 태양을 공전하는 소행성을 발견한다. 국제천문학회에서 B-612라는 이름으로 발표하면서 그는 터키 고유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학회에서는 소행성 발견보다 그의 옷차림에 관심이 쏠렸고, 소행성 발견은 유야무야 됐다. 몇 년 뒤 그는 다시 학회에서 소행성의 존재를 입증하는 내용을 추가하여 발표했다. 터키 국내법의 개정으로 이번엔 서구식 양복을 입을 수 있었다. 세계의 석학들은 비로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B-612 소행성은 우주탐사의 중요한 디딤돌 가운데 하나가 되어 지금도 여전히 태양주위를 돌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우화 어린 왕자에서 기성세대(어른들)의 ‘見옷차림 忘행성’ 모습을 꼬집는 대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른바 ‘정윤회 문건’에서 시작된 ‘비선실세 국정농단’ 의혹이 하염없이 퍼져나가고 있다. 청와대의 고발로 시작된 검찰의 수사가 가닥을 잡은 모양이다. 문건의 내용은 실체를 증명할 수 없다. 문건 작성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미행설’인데, 미행했다는 장본인이 전혀 그런 적이 없었노라고 말한다. 베테랑 정보경찰로 청와대까지 발탁됐던 한 경찰이 소문들을 조합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만든 문건이다. 그 경찰은 청와대를 떠나면서 (나중에 써먹을 요량으로)문건들을 몰래 가져 갔다. 실체가 없는 내용이지만 유출해 간 문건이 대통령기록물이니 큰 죄가 된다. 근거 없고 불법적인 문건에서 출발했던 ‘비선실세 국정농단 운운’은 그러므로 풍문과 찌라시 내용에 불과하다. 이 정도로 간추려 질 듯하다.

청와대 고발에 대한 검찰의 답변은 이를 넘어서기 어렵다. 문제는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요약하면 그 만한 문건 몇 장에 온 나라가 왜 이렇게 난리를 치게 되었는가를 살펴야 한다. 정상적인 숲이라면 라이터 한 개나 횃불 하나로 산불이 일어나지도 않을뿐더러 불길을 키우려면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가뭄으로 숲이 바짝 말라 있거나 건조한 낙엽이 곳곳에 쌓여 있다면 얘기는 다르다. 담배꽁초 귀퉁이 불똥, 훅 불어 끈 성냥개비 잔불만으로도 온 산을 쉽게 태워버리게 된다. 담배꽁초나 성냥개비를 단속하는 일보다 ‘가뭄과 건조’를 살피고 제어하는 게 더 중요하고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다시 견지망월 이야기다. 손가락을 통해 달을 바라보듯, 국민들은 ‘문건 유출’을 통해 ‘비선실세 국정농단’에 의혹을 갖는다. 손가락을 떠난 시선은 달의 실체를 의심하지 않는다. 할머니가 등에 업힌 아이에게 달나라의 방아 찧는 토끼 얘기를 해주며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다. 아이는 달은 보지 않고 할머니의 손가락만 쳐다본다. 할머니는 계속 “저기, 저기”하며 달을 가리키지만 아이는 할머니 손가락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달나라에서 방아 찧는 토끼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이제 없다. 오히려 달을 보겠다는데 자꾸 손가락만 보고 만지라며 눈앞에 가까이 더 가까이 가져다 놓는 격이다. 손가락을 보느라 달을 보지 못한다는 견지망월의 의미가 새롭다. 달을 보지 못하게, 쉽게 잊어버릴 수 있도록 손가락을 더 가까이 더 높게 눈앞에 들이대고 있다. 망월을 위해 견지하는, ‘위망월이견지(爲忘月而見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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