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승의 편파적 육아일기] 19. 이민 생각

가끔, 정말 가끔 이민을 생각한 적이 있다. 이런 저런 주변 사정들을 종합하면 실현 가능성 제로지만 본격적인 육아를 하면서 그 생각은 좀 더 빈번해졌다. 사람 앞날은 모른다고, 혹시 이민 가게 되면 써먹을 요량으로 대형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면허시험장을 두어 번 기웃거리기도 했다.

주변을 살짝 취재해보니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아빠가 혼자만은 아니었다. 그들도 살면서 선진국으로의 이민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다고 했다. 그렇지만 한쪽 다리는 애 낳고 들어앉은 아내가 붙잡고 있고, 나머지 다리엔 자식들이 매달려 있어 운신의 폭이 그리 크지 않다며, 아마도 그냥 이대로 쭉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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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가족끼리 찾은 일본 오키나와 한 해변에서 아들과 함께. 2시간이면 닿는 곳이어서, 비수기인 탓에 제주도보다 저렴하게 다녀올 수 있어서 좋았던 여행이었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아이 데이고 온 아빠들의 눈살 찌푸리게 하는 장면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정민승기자

아이 키우는 아빠들의 이민 생각은 이 땅에서 아이 키우기가 그만큼 팍팍하다는 것. 이 아빠도 같은 하늘 아래서 일어난 어처구니 없는 대형재난에 몸서리쳤고, 약자에 대한 엷은 배려의 이웃을 접할 땐 이곳이 역겨웠다. 무법이 난무하는 길거리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Baby in car’ ‘아기가 타고 있음’ 같은 뒷유리창 스티커가 이렇게 잘 팔리는 나라도 드물 거다. 과거 종종 운전을 하던 아내는 아들이 생긴 뒤로 아예 핸들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또 여기에다 집 앞 어린이집을 두고 애를 멀리 보내야 한다거나, 로또 당첨에 비유되는 유치원 입학, 비싼 유치원 커뮤니티가 엘리트 인맥으로 이어지며 학벌주의가 유치원까지 내려왔다는 둥의 정글 이야기를 들을 때면 화가 났다가도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든다. 이민 생각이 한 번씩 떠오르는 것도 그런 소식을 접했을 때다. 그래서 이민의 긍정적인 면만 떠올리는 행동은 현실에서 상청 받은 영혼에 대한 자위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곳에서 배려심 깊고 친절한 사람들과 숨쉬며, 보행자가 갑이요 내가 을이라고 여기는 운전자들로 가득한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은, 자식 교육문제로 등골 휘지 않아도 좋을 곳에서, 있는 사람들이 더 겸손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이 아빠의 꿈은 말이다.

이민 생각은 마음 속 ‘이민 손익계산서’ 작성으로 이어진다. 이 아빠가 선진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면 아들은 교통사고 같은 불의의 사고를 당할 확률이 줄어들 것이며, 학교 마친 뒤 학원으로 뺑뺑이를 도는 대신 깨끗한 자연에서 뛰놀며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또 가진 것 없어도 무시당하는 일도 덜해 아들의 삶은 이 땅의 평균적인 또래보다 나을 것이다. 후진적인 풍경에 눈살 찌푸리는 이 아빠의 스트레스도 줄어들긴 하겠지만 아빠 엄마의 장점은 이 외에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새로운 사회 시스템에는 언제 적응할 것이며, 부모, 형제,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사는 데서 오는 고독은 어쩔 것인가.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정신없이 뛰어야 할 텐데 그럼 엄마 아빠의 삶은 없어지는 건가. 또 거기서 밀려드는 허무함은 또 어떻게 달랠 것이며, 10개 가까운 제사를 물려받아야 할 장손의 책무는 또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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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라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던 츄라우미 수족관.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려왔고 견학 온 많은 학생들로 붐볐지만 장내는 놀랄 만큼 조용하고 질서정연했다. 정민승기자

지끈거리는 머리는 이 망상에 철퇴를 놓는다. 그리고 제안한다.‘돈으로, 힘으로 자식들을 가르치는 대열에 아예 동참하지 말자. 내가 먼저 남을 배려하고, 내가 먼저 더 점잖게 차를 몰자. 여기가 그곳이라고 생각하고 살자. 그렇게 생각하고 살자. 그렇게 최면을 걸자, 이렇게 살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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