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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욕 먹으니까, 대통령이다

입력
2014.12.14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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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자료사진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의 세계 전략상 사우디아라비아는 절대 놓쳐서는 안될 핵심국가다. 최근 각광받는 ‘셰일 원유’를 제외한 ‘전통 원유’기준으로 세계 매장량의 5분의1을 차지하고, 이슬람 수니파 국가의 맹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요한 사우디 최고통치자가 2002년 4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미국 43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회고록 ‘결정의 순간들’에 따르면 당시 미국과 사우디 관계는 아주 위태로웠다.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왕세제는 팔레스타인을 침공한 이스라엘 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부시 정부도 압박했으나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시의 크로포드 목장에 머물던 왕세제는 중도 귀국을 선언했고, 부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화가 잔뜩 나 떠나려는 왕세제 소매를 붙잡고 부시가 ‘마지막 산책’을 부탁했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일단 시간을 끌려는 속셈이었다. 이 절체절명의 짧은 순간 왕세제 마음을 돌려 미국ㆍ사우디 관계를 구한 건 누굴까. 세계 제1의 아랍어 통역도 아니었고, 미국의 베테랑 외교관도 아니었다.

바로 야생 암컷 칠면조였다. 두 사람이 어색한 침묵 속에 포드 ‘F-250’픽업을 탄 채 정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 갑자기 칠면조 한 마리가 도로를 막아 섰다. 왕세제가 갑자기 부시의 손을 잡고 말했다. “형제여, 이건 알라의 계시입니다.”칠면조 출현에 감복한 왕세제는 곧 마음이 누그러졌다. 산책을 끝낸 왕세제가 일정 재개를 선언했을 때, 외교 참모들은 자신들이 못해 낸 일을 순식간에 해치운 대통령을 존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부시에 따르면 그 목장에서 칠면조를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고, 그 이후로도 없었다.

12년 전 미국 얘기를 꺼낸 건 요즘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는 ‘대통령 비선(秘線)’실세 논란 때문이다. 저잣거리의 그럴듯한 얘기와 살 붙임 때문에 비선 실세의 국정 개입이 일반인에게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검찰 수사와 박근혜 대통령 언급, 그리고 부시 전 대통령의 칠면조 사례를 감안하면 소문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게 개인적 생각이다. 베테랑 외교관이 실패한 걸 칠면조가 해내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초강대국 외교에도 발생하듯, 해명의 논리구조가 상식에 맞지 않더라도 ▦유출된 청와대 비밀 문건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고 ▦비선 라인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박 대통령 말대로 또 일부 언론은 제대로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의혹을 부풀렸을 수도 있다. 박 대통령처럼 아버지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아들 부시도 41대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의 생애를 기록한 책(‘41’)에서 아버지가 재선에 실패한 이유로 편파 언론을 들고 있다. 1992년 유세 도중 식품점을 찾은 아버지 부시가 갓 보급된 계산대 스캐너에 신기한 듯 관심을 기울이자, 현장에도 없었던 뉴욕타임스 기자가 ‘스캐너도 모르는 서민과 동떨어진 후보’라는 식의 기사를 내보냈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 얼마나 화가 났던지 아들 부시는 “아버지가 억울하게 재선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내가 대통령에 도전하는 일은 없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대통령 장남이었을 때와 대통령이었을 때의 기억을 모두 되새기며, 미국 언론과 정치인들의 정제되지 않은 보도와 비판으로 대통령과 일가가 얼마나 큰 스트레스와 고통을 받는지에 대해서도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요즘 박 대통령은 세간의 소문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도 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처지가 비슷한 두 명의 부시 전 대통령들이 강력한 비판과 선거 패배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면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욕 먹는 게 대통령의 일’이라는 듯, 여론을 수렴해 참모진을 개편하고 심기일전의 기회로 삼았다.

조철환 워싱턴특파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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