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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 때 후배 뻘 선배님 앞에서 재롱 떨려니 죽을 맛"

입력
2014.11.1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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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스펙 쌓느라… 경력 쌓아 다시 입사… 대졸 신입 평균나이 男33세 女28세

입사 기수로 서열 결정, 나이·학번 높아도 ㅠㅠ

'족보 꼬인다' 어느 학교 나왔는지 사석에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게 불문율

수년간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다가 고배를 마시고 지난해 늦깎이 중견기업 신입사원이 된 박지관(32ㆍ가명)씨. 그는 두 달에 한번 꼴로 회식할 때면 병가를 내고 싶은 심정이다. 1차에서 삼겹살 굽고, 2차인 노래방에서 춤추며 분위기 띄우기, 3차 호프에서 입가심 뒤 취한 선배들을 택시 태워 집에 보내는 것까지 죄다 막내 박씨 몫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말단사원의 몫이라 생각한다. 정작 그를 더 견디기 힘들게 하는 건 재작년 입사해 이 과정을 느긋하게 쳐다보는 직속 선배가 같은 대학 한 학번 후배라는 사실이다. 박씨는 “남들 앞에서 대학 후배를 ‘선배’라 부르며 경어 쓰는 것까지는 이제 익숙해졌다. 그러나 그 앞에서 회식 때 탬버린 치며 분위기를 띄우는 건 정말로 힘들다. “그나마 대학 때 친하지 않아 나눈 대화가 별로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말했다.

극심한 취업난으로 박 씨와 같은 늦깎이 취업생, 이른바 '올드 루키'가 늘고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위 아래가 바뀌는 게 다반사이지만,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들에겐 '후배 뻘 선배'를 모시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나이 많은 후배를 ‘관리’해야 하는 선배의 고충도 있겠지만 말이다.

대학을 무려 11년 만에 졸업하고 올해 5월 첫 직장에 입사한 이성욱(33ㆍ가명)씨도 비슷한 케이스. 그는 2001년 ‘현역(재수를 안 했다는 뜻)’으로 대학을 입학해 다녔지만 뒤늦게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을 깨닫고 25살에 다른 대학에 입학했다.

05학번 동기들이 이씨에게 붙여준 별명은 삼촌. 이씨는 “선배들이 나이가 적어 서로 말 붙이기가 어색했다. 문제 만드는 게 싫어 ‘불편하니 말 놓으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나이 어린 선배들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말했다. 대학선배들도 하나 둘씩 나이 많은 이씨를 ‘형’이라 부르며 따랐다.

행정고시를 준비했지만 수년간 낙방 후 올해 중견기업에 입사했고 입사 후에 ‘부장’이란 별명이 추가됐다. 하지만 입사 기수를 서열의 기준으로 여기는 회사 생활은 각오한 것보다 녹록하지 않았다.

이씨는 “대학 때부터 10여 년간 훈련이 되어서 그런지 남에게 존댓말 하는 것, 반대로 남으로부터 반말 듣는 건 익숙한 데, 진짜 어려운 건 사람들 태도다”라고 말했다.

물론 '대우 아닌 대우' 받는 일도 있다. 회사 선배들은 이런저런 요구사항을 ‘연장자’란 이유로 이씨를 통해 신입사원들에게 전했고, 동기들 역시 고충상담이 필요할 때는 이씨를 찾았다. 본의 아니게 '동기 대표'가 된 것이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족보가 꼬인다’는 이유로 이씨 앞에서는 대학이나 중고등학교 이력을 절대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5~6살 어린 여자 선배들은 이씨 앞에서 주눅들지 않기 위해 업무지시를 할 때마다 “야” “너”를 추임새처럼 넣었다.

이씨는 “면접 볼 때부터 나이가 문제였다. 면접관들이 ‘일 잘 할 수 있느냐’보다 ‘나이 많은데 막내 노릇 할 수 있겠냐’는 질문만 했다. 신입 교육 후 성과 많은 부서보다 업무시간이 적은 부서에 배치를 받았는데 ‘나이 많아 몸 힘든 일 못시킨다’고 여긴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늘어나는 올드루키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2012년과 2013년 1~7월 기업 신입사원 채용에 지원한 4년제 대학 졸업 및 졸업예정자를 연령별로 분류한 결과 만 30세 이상은 14만1,214명에서 18만5,001명으로 31%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신입사원의 평균 나이도 껑충 뛰어 한국고용정보원이 2012년 상반기(1∼6월) 근로자 100인 이상 주요 기업의 대졸 신입사원 평균 나이를 조사한 결과는 남성 33.2세, 여성 28.6세로 나타났다.

권태희 한국고용정보원 고용정보센터 연구위원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경력직 선호가 늘면서 신입직원 채용이 줄었고 청년 구직자 간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을 쌓기 위해 취업 준비기간을 늘린 결과 신입직원 평균나이가 점점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대로 된 직장을 잡을 때까지 취업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 입사하거나, 일단 취업 후 경력을 쌓아 대기업 신입직원에 재도전해 늦깎이 사원도 함께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실제로 통계청에 따르면 대학졸업 후 첫 직장에 입사하기까지 소요기간이 2005년 10개월에서 2007년 11개월, 올해 12개월로 늘었다. 극심한 취업난에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을 쌓기 위해 휴학과 복학을 반복해 2007년 3년 10개월이던 대학 졸업 소요기간(전문대 포함)은 올해 4년 1개월로 늘었다.

임민욱 취업포털 사람인 홍보팀장은 “경력직 채용이 늘다 보니 예전보다 입사기수를 따지는 문화가 확실히 약해졌다”면서도 “그러나 법조계나 언론계, 의료계 등 일부 직종에서 여전히 나이나 학번보다 입사 연도를 기준으로 서열을 매기는 문화가 강하다”고 말했다.

젊은 상사도 괴롭다

올드 루키들이 많아지다 보니 이러다 보니 이른바 ‘칼졸업’ 후 기업에 곧바로 입사해 사회생활을 빨리 시작한 이들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7년차 직장인 김희경(30ㆍ여)씨는 “회사에서 어린 직원 이미지가 있어 업무지시를 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한다. 후배들이 쉬운 선배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는 휴학 없이 직장에 입사한 케이스로 2008년 입사 당시에도 어린 축에 속했다. 더구나 IT업체 업무 특성상 여자 신입직원 채용이 드물어 입사 3년 만에 동갑인 후배들을 만났을 때 반갑기까지 했다.

그러나 같은 팀 후배 A는 김씨의 부푼 희망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밥 먹듯 지각을 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테스트하며 전산 오류도 부지기수로 냈지만 뒤처리하는 김씨에겐 죽어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루는 밖에서 커피 사주면서 ‘신입에게 첫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다독였어요. 그랬더니 ‘선배는 뭐가 그렇게 미안해서 주눅들어 말씀하시냐’며 웃더라고요. ‘선배’라고 존댓말 쓰면서 대놓고 무시할 수 있구나 싶었죠.”

복도와 휴게실에서 마주치며 친구처럼 지냈던 동갑 후배 B는 같은 팀에 배치되며 사이가 오히려 서먹해졌다. “그 친구는 ‘선배님’하면서 너무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거예요. 전에는 회사 푸념이라도 같이 했는데 이제 일 힘들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죠.”

김씨는 “애매한 동갑 후배보다 차라리 나이 많은 후배가 거리를 둘 수 있어 관계정리가 편하다”고 말했다.

안정된 일자리, 고수익을 보장하는 의학전문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에 나이 많은 지원자가 몰리면서 상대적으로 서열문화가 강한 의료계, 법조계에서도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모 대학 로스쿨을 졸업하고 2011년 변호사자격시험에 합격한 최다연(33ㆍ가명)씨는 취업난에 1년 동안 직장을 구하지 못하다가 지난 해 한 공공기관에서 전문변호사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취업했다는 안도도 잠시, 회사 복도에서 같은 대학원 출신의 로스쿨 2기 ‘후배’가 먼저 “최변, 잘 지내셨죠?”라며 인사를 건네왔다.

최씨는 “대학원 다니면서도 연장자가 많아 한동안 서열정리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직장에서도 비슷한 일을 또 겪었다”며 “이것저것 생각하기 싫어 그냥 내가 일찍 취업한 2기한테 ‘선배’라며 존댓말 쓴다”고 말했다.

대부분 기업들도 올드 루키 증가에 따른 문제점을 인식하고는 있다. 인크루트가 지난해 기업 인사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56.2%는 “신입사원 고령화로 선후배 간 대화 단절, 호칭의 애매함 등 새로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80.0%는 “아무런 대책이나 계획이 없다”고 응답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이상경 인턴기자(경희대 사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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