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호르몬의 노예다. 신체와 감정을 조절하는 호르몬의 분비에 무의식적으로 지배당하면서 살아간다. ‘질풍노도의 시기’ ‘중2병’ ‘갱년기 우울증’ 같은 것들이 결국 호르몬 탓 아닌가.

과로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르티솔이 분비된다. 기분은 우울해지고 신체는 피곤해진다. 도파민이나 세로토닌 분비가 간절해질 때쯤, 갑자기 인터넷 사이트의 쇼핑몰 광고에 눈길이 간다.

“그래, 계절도 바뀌었는데 원피스나 하나 사 볼까?” 그리고는 "이건 지름신의 힘을 빌어 도파민 분비를 활발하게 하려는 뇌의 작용이야"라며 쇼핑 욕망을 합리화시킨다.

원피스 한 벌, 셔츠와 스커트 한 벌씩 골라 장바구니에 넣고 ‘주문하기’ 버튼을 누른다. 근데 이런, 결제 모듈이 실행되지 않는다. 무슨 플러그인을 설치해야 한다고 한다. 설치했다. 그런데 안 된다. 다시금 설치해야 한다는 문구가 나온다. 설치했다. 역시 안 된다.

에이, 오늘도 옷 한 벌 사기는 글렀다. 사실 나는 올해 새 원피스를 한 벌도 사지 못했다. 바쁜 워킹맘으로서 웬만한 상품은 온라인으로 구매하는데, 불편한 결제 시스템 때문에 실패를 거듭한 결과다.

물론 필수품은 결국 산다. 2개월 전 90만원에 구입한 PC 본체는 국내 유명 오픈마켓에서 구입했는데, 이틀 동안 세 대의 서로 다른 컴퓨터를 통해서 12번의 시도를 한 끝에 결국 결제에 성공했다. 구매금액이 30만원을 넘으면 공인인증서까지 필요해 더 복잡한 결제 시스템을 통과해야 했던 것.

그러니 ‘꼭 필요한 물품’이 아닌 의류는 결국 구입을 포기한다. 정부와 카드사는 소득 불평등이 세계 최상위권 수준인 나라에서 얼마 버는 것도 없는 나 같은 임금노동자가 혹시라도 과소비할까 봐 걱정이 태산인 것 같다. 이렇게 불편한 결제 시스템을 그렇게 오래 유지하는 걸 보면 말이다.

액티브X와 공인인증서, 여기에 카드사의 자사 결제모듈 고집까지 삼중 잠금장치를 걸고 있는 한국의 인터넷 결제 시스템은 반겨야 할 손님을 내쫓아 버린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은 “PC 사용자 20%, 모바일 사용자 50%가 결제페이지에서 물건값을 치르다가 이탈한다”고 분석했다. 이 회사는 소비자 이탈을 줄이기 위해 해외 은행에까지 찾아간 끝에 액티브X 같은 플러그인이 필요 없는 간편 결제 시스템을 도입했다.

정부가 올해 30만원 이상 공인인증서 의무사용 규제를 폐지했지만 적용된 쇼핑몰은 거의 없으며, 적용하더라도 신원 확인 과정은 여전히 필요하다. 카드사가 직접 노출하는 홍보 문구까지 출력하려면 플러그인 설치는 계속된다.

민간소비 부진을 걱정하며 경기 활성화를 위해 내년도 ‘슈퍼 예산’을 짠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이런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인터넷 결제만 간소화해도 연간 1,200조원에 달하는 국내 전자상거래 규모가 대폭 늘어날 텐데 말이다. 하긴 전임 경제부총리는 올해 4월 “공인인증서가 지금까지 전자상거래 활성화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으니 관료들이 사는 세상은 딴세상 같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 해외에선 결제혁신이 진행 중이다. 미국에선 터치 한번에 결제가 되는 애플페이가 나왔고, 중국의 간편결제 알리페이는 기존 휴대폰 유통구조를 파괴한 스마트폰 ‘샤오미’의 인터넷 판매 ‘대박’을 가능케 했다. 한국에서 스마트폰을 인터넷으로 구매하게 했으면 반 이상이 결제 과정에서 이탈했을 것이다.

이제 알리페이의 모회사 알리바바는 미국 나스닥에 상장해 페이스북보다 시가총액이 많은 회사가 됐다. 중국 관광객들이 밀려드는 명동에는 알리페이 광고까지 보인다. 머지 않아 한국 인터넷 시장은 알리페이가 지배할지도 모르겠다. 중국 인터넷 쇼핑업체가 저렴한 중국 제품을 팔기 위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서비스를 하면서 알리페이를 지원한다면 한국 쇼핑몰 시장 판도가 변할 수도 있다.

솔직히 나는 그렇게 과소비하는 편도 아니다. 주말에 대형마트에서 애들 장난감 사주고 점심시간에 밥 사먹는 정도가 평소 내 소비의 대부분이다. 그 흔한 명품가방 하나 산 적 없다. 그러니 계절 바뀔 때 5만원짜리 원피스 한 벌 사 입는 정도는 좀 허락해 달라. 나도 쇼핑할 때 스트레스 호르몬이 아닌 행복 호르몬이 분비되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

최진주 디지털뉴스부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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