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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 사고' 2011년 당시 무슨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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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 사고' 2011년 당시 무슨 일이?

입력
2014.09.1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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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에 날아간 지붕과 벽, 주렴처럼 주렁주렁 늘어진 흉물스러운 철근과 구겨진 배관, 곳곳에 널려진 콘크리트 잔해.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福島) 제1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 건물 내부를 사고 발생 1년 2개월 만인 지난 2012년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했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원자로 건물은 지상에서 쳐다봤을 때 4층과 5층의 벽과 천장이 폭발로 날아간 모습이 뚜렷했고, 배선과 배관, 철골이 사방팔방으로 너덜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건물 입구의 방사선량은 시간당 120 마이크로시버트로, 9시간 이곳에 있으면 일반인의 연간 피폭한도인 1밀리시버트 이상 피폭하게 될 정도로 방사선 수치가 높았다. 사진은 천장이 날아간 4호기 내부 모습. 연합뉴스
폭발에 날아간 지붕과 벽, 주렴처럼 주렁주렁 늘어진 흉물스러운 철근과 구겨진 배관, 곳곳에 널려진 콘크리트 잔해.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福島) 제1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 건물 내부를 사고 발생 1년 2개월 만인 지난 2012년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했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원자로 건물은 지상에서 쳐다봤을 때 4층과 5층의 벽과 천장이 폭발로 날아간 모습이 뚜렷했고, 배선과 배관, 철골이 사방팔방으로 너덜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건물 입구의 방사선량은 시간당 120 마이크로시버트로, 9시간 이곳에 있으면 일반인의 연간 피폭한도인 1밀리시버트 이상 피폭하게 될 정도로 방사선 수치가 높았다. 사진은 천장이 날아간 4호기 내부 모습. 연합뉴스

2011년 3월 11일 도호쿠 대지진과 쓰나미 여파로 발생한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 3년6개월이 지났다. 15.5m 높이의 쓰나미가 원전을 덮치자 모든 전원공급이 상실됐고, 가동중인 원자로가 올스톱했다. 이로 인해 원자로 건물이 수소폭발을 일으켰고, 핵연료가 녹아 내리면서 사상 최악의 방사능 유출사고로 이어졌다.

일본 정부는 2011년 7월22일부터 11월6일까지 13차례에 걸쳐 후쿠시마 제1원전 현장을 지휘했던 요시다 마사오(2013년 사망) 소장을 상대로 조사한 일문일답을 토대로 작성한 이른바 ‘요시다 조서’를 최근 공개했다. 조서는 정부 사고위가 요시다를 청취 조사한 내용을 일문일답 방식으로 남긴 것으로, 사고 당일인 3월11일부터 15일까지 닷새간 원전내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주로 기록하고 있다. 조사는 현장에 파견된 검사가 실시했다. 29시간에 걸친 요시다의 육성 녹음은 A4용지로 400쪽이 넘는다.

이 조서는 당시 최전선에서 사고 수습을 지휘한 담당자의 증언을 기록한 유일한 공식 조서로 향후 원전 사고대응에 필요한 안전대책을 수립하는데 활용이 가능한 역사적 자료다. 특히 이 조서는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사고 직후 외부에 알리지 않고 감추고 있던 각종 내용뿐 아니라 초기 대응에 실패, 초대형 사고로 이어진 현장 책임자의 통렬한 반성이 담겨있어 더욱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아무리 원전 전문가들이라고 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지진, 쓰나미, 원전사고가 동시에 발생하면 착각과 잘못된 판단 등 사고 대응에 허점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에서 원전을 운영하는 한국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원전 사고 초기 긴박했던 상황을 요시다의 조서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문일답형식으로 재구성했다.

2011년 3월 11일

-쓰나미가 (원전을) 덮친 후 전원장치가 상실되는 과정은.

“솔직히 말해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 사고가 닥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전원 회복을 위한) 비상디젤 발전기는 물론 비상노심냉각계통 펌프 사용도 불가능했다.”

-비상용복수기(IC)를 둘러싼 늑장 대응이 사고를 키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저녁이 되자 중앙제어실 운전원이 1호기 비상용 복수기(ICㆍ비상시 작동시키는 냉각장치) 기능이 저하됐다며 냉각수 부족을 의심했다. 하지만 IC가 작동한 것은 지난 20년간 이번 사고가 처음이었던 터라 기능 저하의 원인이 냉각수 부족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훈련, 검사를 포함, IC를 오랜 기간 다뤄본 사람은 원전 내에 한 명도 없었다. 이 때문에 운전원에게 ‘원자로에 주수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만 내렸다. 뒤늦게 오후 10시께 1호기 원자로 건물의 방사선량이 상승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IC작동이 안 된다고 의심, 긴급대책실에 연락해 경유로 움직이는 펌프로 물을 보충하라고 지시했으나 사태는 이미 늦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크게 반성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요시다가 IC기능 저하를 일찍 눈치챘더라면 피해가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정부 분석에 따르면 후쿠시마 원전 직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1호기는 오후 6시에 노심이 손상됐고, 2시간 후부터 노심이 녹아내리는 노심용융이 시작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본사인 도쿄전력에서 아무런 지시가 없었나.

“본사에서 내려온 조언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전문가들은 본사 차원에서 적절한 지시를 내리지 않은 것은 도쿄전력 위기관리 체제의 문제점을 보여준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3월 12일

-아침에 간 나오토 총리가 사고 현장을 둘러봤다.

“간 총리는 방문 목적을 전하지 않은 채 현장에 도착했다. 간 총리는 상당히 엄격한 어조로 상황을 물었고, 전원이 거의 상실돼 제어가 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1호기 수소폭발은 어떻게 파악했나.

“1호기 핵분열을 억제하는 붕소주입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아래에서 솟구치는 듯한 진동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또 지진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현장 직원으로부터 1호기 원자로 건물이 수소폭발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격납용기에서 새어 나온 수소에 의한 폭발일 것으로 판단했고, 노심이 외부에 노출돼 손상을 입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총리 관저의 명령을 어기고 원자로에 해수 주입을 결정한 이유는 무언가.

“12일 오후부터 담수가 모자라 해수 투입 준비를 했다. 해수로 냉각하는 것은 세계에서 전례가 없지만, 격납용기의 압력을 어떻게든 낮추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해수를 주입한 직후 도쿄전력 본부에서 ‘총리 관저가 해수 주입을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해수주입을 계속했다.(요시다는 당시 연쇄 핵분열로 재임계 상태로 치달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해수 주입 중단을 요구한 총리 관저의 지시를 어겨 명령위반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결과적으로 요시다의 판단이 옳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3월 13일

-총리관저에서 해수주입을 중단하라는 전화가 또 걸려왔다던데.

“원자로 3호기의 냉각수 수위가 낮아져 핵연료가 노출될 위기에 놓였다. 오전 5시42분 담수가 들어있던 탱크가 완전히 비었다는 보고를 받고 해수 주입을 결단했다. 오전 6시43분 관저에서 대기중인 도쿄전력 직원에게서 전화가 와 재차 원자로를 손상시키는 해수 주입을 중단하고 담수를 사용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담수를 최대한 끌어 모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낮 12시가 넘어서야 ‘더 이상 물이 없다’고 판단, 해수 주입 전환을 지시했고, 이날 오후 1시11분께야 해수 주입을 시작했다.(당시 수시간 가량 3호기에 냉각수가 주입되지 않아 원자로는 점점 과열,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다. 당시 관저에서 요시다에게 전화를 건 인물은 현재까지 정체불명으로 남아있다.)

-사용후 연료 수조의 상황은 어땠나.

“(사고)처음부터 위험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연료수조 역시 냉각이 되지 않으면 온도가 상승, 냉각수가 증발할 수 밖에 없어 손을 써야 했다. 특히 4호기는 정기점검이 시작된 시점이어서 연료를 모두 수조에 넣어둔 상태였다. 1년간 사용한 548개의 연료봉은 온도가 높은 상태여서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3월 14일

-이날 3호기에서도 수소폭발이 발생했다.

“오전 9시30분에서 10시 사이에 3호기가 수소 폭발할 가능성이 있어 모두 지진 안전 중요동으로 대피해 있는데 도쿄전력 본사에서 상황이 진정됐으면 현장에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복귀하려는 순간 수소폭발이 일어났다. 당시 직원 40여명이 행방불명이라는 보고를 받고 이들이 모두 사망했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들이 죽었다면 나도 할복자살하려고 했다.”

-2호기 상황도 심각해졌는데.

“3호기 냉각수 주입이 중단된 상태에서 2호기에도 냉각수 주입을 준비해야 했다. 방치하면 더 심각한 상태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마운 것은 당시 직원들이 방사능 피폭 위험을 무릅쓰고 모두 현장에 가려고 했다. 당시 대다수 직원이 과잉피폭했지만 덕분에 오후 4시30분 해수 주입을 재개할 수 있었다.”

-3호기에서 고농도 방사성물질을 외부로 방출하는 드라이 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3호기는 14일 새벽 주입할 물이 고갈돼 물을 통과시켜 격납용기의 압력을 낮추는 웨트(wet)벤트를 실시했으나, 여의치 않아 드라이 벤트를 준비했다. 하지만 웨트 벤트 작업중 발생한 폭발로 압력이 내려가 드라이 벤트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드라이 벤트는 웨트 벤트에 비해 100~1,000배 농도가 높은 방사성 물질을 외부로 방출, 대량의 방사성 피폭을 동반할 우려가 높아 위험성을 인근 주민에게 알릴 책임이 있지만 도쿄전력은 이를 무시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3호기의 압력상승을 보도하지 않도록 도쿄전력과 후쿠시마현에 요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3월 15일

-2호기 수소폭발로 대피를 지시했다는데.

“오전 6시15분께 사고수습작업을 지휘하는 제1원전 지진안전 중요동 2층 비상대책실에서 2호기에서 충격음이 들리고 원자로 압력억제실의 압력이 ‘0’이 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현장에서는 2호기 격납용기가 파괴됐고, 직원 720명이 대량 피폭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반면 긴급대책실 방사선량이 상승하지 않아 현 시점에서는 격납용기 파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판단, 방사선량이 높은 곳에서 일시 대피했다가 즉시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제1원전 부지 내에서 대기할 것을 지시했다.”

-직원들이 제2원전으로 피난한 것은 지시를 어긴 것 아닌가.

“나는 사실 2F(후쿠시마 제2원전)에 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제1원전 부근에서 부지 내외를 불문하고 선량이 낮은 곳에 일시적으로 대피한 뒤 지시를 기다리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모두 전면마스크를 쓴 상태에서 수시간 (제1원전 내에)피난해있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그들이 제2원전에 간 것이 타당했다고 생각한다.”(아사히신문은 지난 5월 중순 요시다 증언을 단독 보도하면서 직원들이 제2원전으로 대피한 것이 타당하다는 요시다의 생각을 반영하지 않은 채 명령위반 부분을 강조하는 기사를 썼다가 조서 공개 후 이 기사를 취소했다.)

도쿄=한창만특파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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