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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감독만으로… 직접 증거 없어도 선거개입 "유죄"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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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감독만으로… 직접 증거 없어도 선거개입 "유죄"로 봤다

입력
2014.09.1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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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우호적 보도자료 배포 공무원 "공모하거나 보고 안 해" 주장했지만

"정황상… 암묵적 연락" 유죄 판결, "지시 안 해" 원세훈 면죄부와는 대비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의 1심 재판부는 ‘선거운동’의 범위를 아주 좁게 해석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 3명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봤다. 하지만 다른 공무원들의 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담당 재판부의 판단은 사뭇 달랐다.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한다는 목적의사’나 ‘명시적인 지시’의 유무를 보다 포괄적으로 해석했다.

광주지법 형사12부(부장 마옥현)는 지난 6월 27일 강운태 전 광주시장의 재선을 위해 선거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된 류종성 전 광주시 대변인 등 12명의 공무원 전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류씨는 6ㆍ4 지방선거를 앞두고 강 시장에게 불리한 기사가 뜨면 이를 희석시키기 위해 대변인실 소속 뉴미디어팀 직원들을 동원, 강 시장에게 우호적인 내용이 담긴 보도자료를 22차례에 걸쳐 인터넷 언론사 기자들에게 뿌렸다. 이른바 ‘밀어내기’를 한 것으로,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이 ‘오늘의 유머’ 등 진보성향 인터넷 사이트에서 야당에 유리한 글을 베스트 글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연예ㆍ요리 글을 집중적으로 추천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류씨는 법정에서 “내가 직접 지시한 것은 2회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밀어내기’를 공모하지도, 포괄적 보고를 받거나 지시를 한 사실도 없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모란 공동실행에 관한 ‘암묵적인 의사연락’이 있으면 충분하고, 직접 증거가 없더라도 ‘정황사실과 경험법칙’에 의해 이를 인정할 수 있으며, 류씨는 뉴미디어팀 업무를 총괄 관리ㆍ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게 류씨 주장을 배척한 이유였다. 국정원 사건 재판부가 “(심리전단 직원들에 대한) 명시적인 선거운동 지시가 없었다”며 원 전 원장뿐 아니라 함께 기소된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 등 지휘라인 모두에게 면죄부를 준 것과는 뚜렷이 대비된다.

지난 2007년 관권선거운동을 벌인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신중대 전 안양시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006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무원 수십명을 동원, 인터뷰와 토론회 자료 등을 작성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기소된 신 전 시장은 “관여한 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ㆍ2심 재판부와 대법원은 “(평소 업무관행을 볼 때) 신 전 시장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지시 하에 자료가 작성돼 전달된 것으로 보이고, 해당 자료를 사용한 이상 구체적인 지시를 안 했다고 해도 달리 볼 것은 아니다”고 못박았다. 단순히 ‘명시적인 지시’가 있었는지가 아니라, 공무원들이 선거개입 행위를 왜 했는가를 종합적인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국정원 사건 재판부는 그러한 고려가 없었다. 공개된 원 전 원장의 ‘지시ㆍ강조 말씀’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행간에서 ‘선거에서 여당이 이기고, 야당이 져야 한다’는 뜻이 명백히 읽힌다. “사실상 북한에서 지령이 내려오는 게… 2012년에 정권을 바꿀 수 있도록 다 모여라. 단일화해라”(2010년 4월 16일) “이제 총선도 있고 대선도 있고… 종북 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 가지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다시 정권을 잡을라 그러고… 야당이 되지 않는 소리 하면 강에 처박아야지”(2012년 2월 17일) 등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대법원 판례에서 “선거운동은 특정인의 당선,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성과 능동성, 계획성이 있어야 한다”는 문구에만 치중했고, “단순히 그 행위의 명목뿐 아니라 행위가 행해지는 시기ㆍ장소ㆍ방법 등을 종합적으로 관찰해야 한다”는 부분은 외면했다.

심지어 대법원 판례를 잘못 적용한 흔적도 보인다. 재판부는 “‘선거운동’과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엄격히 구분되는 개념”이라며 “좁은 개념인 선거운동에 해당하지 않으면 공무원의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을 했다고 볼 수 없다”고 했지만, 그 근거가 된 판례의 취지는 반대다. 공무원이 출마자에 금전을 건넨 것 자체가 선거운동은 아니라 해도 ‘선거운동의 기획에 참여하는 행위’이므로 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지난 7월 14일 이 사건 결심공판에서 재판장(이범균 부장판사)은 “정치적 색채를 빼고 법리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던 다짐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겠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합리적 의심’과 ‘종합적 판단’까지 배제한 결과 ‘정치적 판결’이 되는 역설에 이르렀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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