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원래부터 공부 못하는 아이는 없다" 눈높이 수업이 변화 불러

입력
2014.08.27 04:40
0 0

학습 부진반에 속했던 학생들 영어단어 무조건 외우게 하기보다

타이포그래피 기법 도입하자 주눅 들어 있던 아이들 성적 쑥쑥

서울 강동구 천호중학교에서 학생들이 영어 단어의 뜻을 글자 디자인으로 표현하는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하고 있다. 신상순선임기자 ssshin@hk.co.kr
서울 강동구 천호중학교에서 학생들이 영어 단어의 뜻을 글자 디자인으로 표현하는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하고 있다. 신상순선임기자 ssshin@hk.co.kr

서울 강동구 천호중학교 1학년인 김지연(가명ㆍ14)양은 수업시간마다 졸기 일쑤였다. 아프리카TV로 매일 오후 7시부터 이튿날 새벽 2,3시까지 유명 게임 ‘마인크래프트’를 하는 것을 방송하느라 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TV에서 지연양은 방송진행자(BJ)가 돼 블록으로 건물과 벽을 쌓는 게임 장면을 생중계한다. 학교 성적이 바닥권인 지연이에게 인터넷 방송은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매일 30여명, 한 달이면 1,000여명 시청자의 관심을 쉽사리 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최근 지연이에겐 큰 변화가 생겼다. 학교 공부와는 담을 쌓았고 따돌림, 우울증까지 겪던 지연이는 요즘 공부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1학기 기말고사 영어성적은 중간고사 때보다 16점이나 올랐다. 이 학교 송형호 영어교사가 5월부터 타이포그래피 교육법을 도입하면서부터다.

영단어 그리기로 흥미 향상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란 문자를 배치해 생각이나 의도를 표현하는 시각 디자인 기법. 송 교사는 지연이가 포함된 학습부진반 수업 시간에 영어 단어를 쓴 뒤 달달 외우도록 하는 대신 뜻을 알려주고 단어를 그려보라고 했다.

수업시간에 소리를 지르고 돌아다니며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던 반 학생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상상력으로 단어를 그려냈다. ‘따라가다’는 의미의 ‘follow’의 ‘l’은 함께 뛰어가는 두 사람으로 변신했고, ‘세계’를 뜻하는 ‘world’ 중 ‘o’는 지구 모습으로 그렸다. 지연이는 “선생님이 마인크래프트로 블록을 쌓아 영단어를 그려오라고 숙제를 자주 내줬는데,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다보면 단어의 뜻을 쉽게 외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연이와 같이 학습부진반에 속한 박정인(가명ㆍ14)은 특히 타이포그래피에 두각을 나타냈다. 연예기획사가 주최하는 가수 오디션을 쫓아다니느라 늘 공부는 뒷전이었던 정인이는 ‘타다’라는 뜻의 ‘ride’에서 ‘d’를 한발 자전거로 형상화하고, ‘think(생각하다)’를 놓고는 ‘h’ 위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상념에 잠긴 사람을 그려 넣었다. 지금껏 정인이가 그린 타이포그래피는 100개가 넘는다. 송 교사는 그 중 잘 그린 것은 교실 칠판에 붙여 모든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늘 주눅이 들어있거나 반항심에 가득하던 학습부진반 학생들은 처음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고 있다.

송 교사는 “1학기 기말고사 영어시험이 어려워 전체 학년 평균이 4점 내려갔는데, 학습부진반 학생 12명 중 11명의 성적은 평균 10점 올랐다”고 말했다. 현재 서울 지역 5개 중ㆍ고교에서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도입했다.

수학 눈높이 낮춰 자신감 부여

학습부진 학생들에게 이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수업방식의 개선이었다. “아무리 해도 학생들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일부 교사들의 말과는 달리, 문제는 뒤떨어진 학생이 아니라 일률적인 잣대로 가르치는 수업방식이었던 것이다.

인천 신광초에 재학 중인 김승민(가명ㆍ13)군은 지난해 1학기 첫 시험과 2학기 기말고사의 수학 점수가 44점에서 76점으로 32점이나 올랐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영어 등 5과목을 평균 낸 점수도 같은 기간 59.6점에서 87.2점으로 수직 상승했다. 축구 경기에서 지면 울 정도로 승부욕ㆍ근성이 강하지만 좀처럼 성적이 오르지 않았던 승민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역시 해답은 수업의 눈높이였다. 당시 승민이를 가르쳤던 이희천 교사는 중상위권 학생들 수준에 맞춰 수업하는 기존의 틀을 깨고, 수준을 대폭 낮췄다. 학습부진 아이들의 수준을 기준으로 바꾼 것이다. 수업시간 40분 중 25~30분은 전체적인 내용을 쉽게 설명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학습부진 학생에게 다시 설명을 해줬다. 간단히 풀 수 있는 기본 개념 문제는 학습부진 학생들에게 풀도록 시켜 수학에 자신감을 갖게 했다. 이 교사는 “반 22명 중 1학기 중간고사 때 60점 미만을 받은 수학 부진 학생이 11명이었는데 2학기 기말고사 때는 한 명도 없었다”며 “특별한 방법은 아니지만 수업 수준을 낮추는 것만으로도 학습부진 학생 구제에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아이들 잠재력 일깨워야

수업의 변화는 연쇄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 배움터보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학교에서 낙오자처럼 주눅 들어 있던 아이들의 얼굴에서 다시 웃음꽃이 피었고, 교우관계도 좋아졌다. 수업 종이 울린 뒤에도 복도를 서성이거나 수업시간에 멍하니 있다가 조는 일 또한 사라졌다.

거듭된 실패의 경험으로 ‘나는 어떤 것을 해도 잘 못한다’는 학습된 무기력이 사라지고, 바닥까지 낮아졌던 자존감을 회복한 결과다. 정인이는 “영어 자체가 싫었는데, 지금은 영어수업 시간이 상당히 재미있다. 공부에도 조금씩 관심이 간다”고 했다. 정인이와 지연이를 포함한 학습부진 학생 10여명은 현재 타이포그래피로 중학교 필수 영단어 800개를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송 교사는 “현행 교육방식이 언어ㆍ논리 능력 위주로 평가하기 때문에 해당 능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학생들이 소외받는 것이지 원래부터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없다”며 “아이들의 다양한 능력을 고려해 모두가 1등이 되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