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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다에우(Daewoo)의 추억

입력
2014.08.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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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기업사에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만큼 파란만장했던 인물이 또 있을까 싶다. 기업하는 사람에게 부침은 따르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김 전 회장만큼 극단적인 영욕(榮辱)의 삶을 산 기업인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대우가 해체된 게 1999년이니까 젊은 세대에게 그는 생소한 인물일 게다. 막연하게 '망한 재벌총수'쯤으로 알려져 있을 수도 있다. 30대 정도라면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필시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자신은 외국으로 도망간 오너'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대우 해체 후 6년 가까이 그는 유럽과 동남아 등을 오가며 도피생활을 했다. 대우 부실을 정리하는 데 30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이 들어갔고, 수많은 대우 계열사와 협력업체 종업원들이 실직의 피눈물을 흘렸던 바로 그 기간이었다. 엎드려 사죄하고 죗값을 치러도 모자랄 판에 해외로 도망까지 갔으니, 그에겐 부실기업주 낙인에다 비겁과 부도덕의 이미지까지 덧씌워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김 전 회장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건 대우 해체의 부당함을 공개적으로 호소하면서다. 대우 해체 15주년을 맞아 펴낸 책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그는 당시 환란수습을 주도했던 핵심 경제관료들의 오판과 견제로 인해 자신이 국내 2위 그룹인 대우가 공중 분해됐다고 주장했다. 강력한 정부지원을 통해 수출을 늘려 외환을 확충하면 대우도 살고 한국경제도 살 수 있었는데, 관료들이 재벌개혁을 위해 대우그룹을 '기획해체'의 타깃으로 삼고 주요 계열사들을 헐값에 팔아 치웠다는 게 그의 항변 요지다.

경제팀 핵심라인이었던 강봉균ㆍ이헌재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재무적으로 가망이 없었던 대우는 정부 아닌 시장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일관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 무렵 나는 담당기자로서 대우그룹 해체를 취재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시장에서도 김 전 회장의 처방을 '구조조정을 피하려는 꼼수'정도로 여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지금 김 전 회장의 울분 섞인 주장은 재계에서도 큰 공감을 얻지 못한 채 그저 '실패한 노기업인의 한풀이'정도로 보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옳든 그르든, 대우 해체가 정당했든 부당했든, '기업인 김우중'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종합적이고 다면적으로 이뤄졌으면 한다. 부실의 주범, 부도덕한 재벌, 비겁한 오너로 축약해버리기엔 그에 대해 조명해야 할 부분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압축적 산업화를 끝내고 서울올림픽 개최, 북방외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계화를 추진하던 1980~90년대는 분명 '대우의 시대'였다. 현대 삼성 LG도 열심이었지만, 글로벌 시장 개척에 관한 한 대우와 김 전 회장은 DNA 자체부터 달랐다.

냉전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동유럽으로 달려가 자동차공장을 인수하고 은행까지 세운 곳이 바로 대우였다. 중남미에서 대중들의 눈에 가장 먼저 띄는 택시와 경찰차 시장부터 장악한 것도 대우였다. 아직 별 왕래도 없었던 중국과 베트남에 호텔을 짓고, 카자흐스탄까지 날아가 공장을 세운 것 역시 대우였다. 적어도 이들 신흥시장에서만큼은 '코리아'보다 '다에우(Daewooㆍ대우의 현지식 발음)'가 더 유명 브랜드였다. 지금은 누구나 가는 길이지만 그 당시엔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 요즘 최경환 부총리의 표현으로 유명해진 '지도에 없는 길'도 갔던 기업이 바로 대우였던 것이다. 한때 무모하게 대통령의 꿈까지 꿨던 그이지만, 어쨌든 우리나라 '넘버 원 세일즈맨'이란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대우가 없었더라면 우리나라가 새 시장을 뚫는 데 10년은 더 걸렸을지 모른다. 김 전 회장과 대우맨들이 만들어 놓았던 네트워크와 브랜드 인지도는 어떤 첨단기술이나 제품보다도 뛰어난 한국경제의 글로벌 자산이 되었다. 지금 동유럽과 중남미를 석권하고 있는 삼성 스마트폰과 현대자동차도 대우의 덕을 전혀 보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들 기업가 정신의 실종을 걱정한다. 대우가 사라진 지 15년, 이젠 실패 부실 부도덕이 아닌 대우와 김 전 회장의 다른 절반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성철 부국장 sclee@hk.co.kr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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