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팔자걸음 좀 고쳐라, 어그적 어그적. 여기 선 따라 걸어봐.”

“삼촌이 시키시니까 하는 거예요!”

진도 실내체육관 바닥에 그어진 선을 따라 뒤뚱거리며 걷는 나를 보고 삼촌은 ‘깔깔깔’ 웃으신다. 팔과 다리를 크게 벌리고 걷는 내 걸음걸이도 곁들여 따라 하신다. ‘세월호 참사 두 달 기획’ 취재를 시작한 지 꼭 엿새째. 나는 단원고 실종 학생 남모(17)군의 아버지를 ‘삼촌’이라 부르게 됐다.

진도 팽목항에는 단원고 아이들이 평소 아끼던 물건들이 놓여져 있다. 단원고 음악 동아리였던 남모(17)군이 좋아하던 기타.

취재 첫 날인 6월 8일 오후 2시쯤, 갓 체육관에 들어선 내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한 쪽 팔에 바늘을 꽂고 누워 연신 주먹으로 가슴을 쳐대는 삼촌의 모습이었다. 링거를 맞고 있는 모습조차 힘겨워 보였다. 바닥에 깔려있는 수십 개의 이불 사이를 가로질러 곧장 삼촌 근처로 갔다. 가까이서 그의 표정을 보니 말문이 턱 막혔다. ‘무슨 말로 첫 마디를 떼어야 하지. 이불을 딛고 올라가서 손이라도 잡아드릴까. 아니야, 잠시 밖으로 나오실 때까지 기다려보자.’ 삼촌이 누워있는 분홍색 이불 끝에 발끝을 맞추고 20여분을 멀뚱히 서 있었다.

눈만 깜빡이던 나에게 한 약사는 “시신이 수습되는 날이면 가족들의 건강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진다”고 귀띔했다. 당일 오전, 참사 54일만에 시신 2구가 발견됐다는 소식에 끙끙 마음 졸였을 삼촌. 자신의 피붙이가 아님을 확인하고 절망했을 그의 마음을 감히 상상했다. 그리고 이내 결심했다. ‘체육관을 나가야겠다.’

현관 계단에 앉아 실종자 가족들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자니 4월 23일 한국일보 입사 최종면접 날이 자꾸만 떠올랐다. “기자는 누구나 할 수 있으면서 아무나 할 수는 없는 직업이라고들 한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한 면접관이 던진 질문이 끝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세월호 참사를 예로 들며 ‘기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선 안 된다’ 당연하다는 듯 설명을 해댔던 것 같은데.

한 달 경력의 견습기자가 마주한 세월호 참사 현장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어떤 이와도 대화를 틀 수 있다고 자신 있어 하던 내가, 사람을 앞에 두고 입 한 번 못 뗀 채 멍하니 서 있기를 며칠. 아픈 경험은 묵혀두지 않고 곧바로 털어내던 씩씩이는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 기억을 매시간 되새김질 했다.

진도 실내체육관 취재 첫 날인 6월 8일, 안중근(17) 학생의 시신이 수습됐다. 체육관에는 어려서부터 야구를 좋아하던 중근 학생이 선물 받은 야구 유니폼이 가지런히 걸려있다. 시신이 중근이임을 확인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매만지고 있다.

진도에서의 9박 10일간 참 많이 배웠다. 가늠도 할 수 없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이들에 손 내미는 법,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았던 이들로부터 소주 한 잔 건네 받는 법, 죄송해 함부로 오르지 못했던 그들의 터전인 이불 위로 초대받는 법, 그리고 현장에서 받는 상처를 꾹꾹 눌러두는 법까지. 직전 일주일 간 안산 합동분향소에 파견됐던 경험을 포함해 평생 잊지 못할 것들을 얻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로는? 6월 24일 오전, 세월호 참사 70일만에 주검 한 구가 수습됐다는 소식을 회사로부터 들었다. 체육관 분위기를 독자에 전달해보자는 지시가 내려왔다. 삼촌께 전화를 걸었다. 축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 올라온 아이가 남군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챘다. 처음 뵈었던 그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어렵사리 입을 뗐다. ‘삼촌 힘내세요, 다른 분들은 어때요, 아이도 곧 올 거예요, 또 연락 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한숨을 푹푹 내쉬며 선배께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기사에 실렸다.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보던 동기 한 명이 조용히 눈물을 닦는다. 최근에서야 물었다. “그때 왜 울었어?” “그냥. 우리도 어쨌든 기자가 돼 가는구나 싶어서.” 견습기자 석달 차, 오늘도 또 많이 배운다. [견습수첩]

신지후기자 h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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