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당장 내려!” 오전 6시 첫차로 경기도 안성 금수원에 내려가 장장 16시간 동안의 뻗치기를 마치고 오후 11시 마지막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맡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바이스캡(사회부 경찰팀 부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검경이 지루한 밀당 끝에 드디어 내일 오전 금수원 내부에 진입한다는 첩보였다. 바이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막 먹기 시작한 만두를 젓가락에 그대로 꽂은 채 도로 한 가운데서 뛰어 내렸다. ‘그토록 뻗쳤는데 드디어 들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허겁지겁 입 안에 잔뜩 처넣은 만두를 우물거리며 자정 가까운 시각에 안성 시골길에서 택시를 잡고 모텔로 향했다. 견습 생활은 한 달을 갓 넘기고 있었다.

견습 기간 가장 친숙해지는 단어가 바로 이 뻗치기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광장에서부터 총리 후보자 집 앞, 구원파 신도들이 살고 있는 금수원 정문까지, 뻗치기엔 장소도 대상도 대중없다. 고독한 혼자만의 싸움이기도 하고 타사 동료들과 해후의 장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취재원과의 정신싸움에서 이길 때까지,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무식한 취재 정신을 배우는 건 다르지 않다.

유병언 회장 사체가 발견된 22일, 금수원에 파견돼 구원파 신도가 내준 의자에 앉아 현장을 지키던 한국일보 견습기자들을 신도로 오인해 영상을 내보낸 종편 뉴스 캡처본.

“금수원에 숨어 있을지 모를 유병언을 찾아라!” 금수원 뻗치기는 우리 한국일보 견습들에겐 특히 남달랐다. 주간조, 야간조를 나눠 12시간씩 금수원 정문 앞에서 뻗친 지 한 달째였다. 타 언론사가 모두 철수한 날 새벽에도 정문 앞을 지키는 건 우리들이었다. 안성 시골길의 새벽 늦봄 추위는 매서웠다. 야간 뻗치기에 당첨(?)된 견습들은 주로 남자 동기였고 뻗치기를 하고 온 다음 날이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귀신 본 듯 퀭한 얼굴을 하고 경찰서로 복귀했다. 감기를 달고 돌아온 견습도 있었다. 한국일보의 초강력 뻗치기에 타사를 비롯해 금수원 신도들까지 혀를 내둘렀던 건 물론이다. 한국일보에서 왔다고 얘기도 하기 전에 우리를 알아보는 신도들이 많아졌다. 홑겹 셔츠 하나 입고 덜덜 떨고 있는 견습들에게 담요와 초코파이를 나눠 주는 신도들이 구세주처럼 보이는 날들이 잦아졌다.

그런데 그토록 굳게 닫혀 있었던 금수원 정문이 드디어 열린다는 것이었다. 사실 내가 간 날의 금수원 뻗치기는 고독한 혼자만의 싸움에 가까웠다. 종합편성채널 카메라 몇 대 말고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하루 종일 흙바닥에서 졸다 깨다를 반복했던 뻗치기는 바이스 전화 한 통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현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난 한 달 동안 안성 길바닥에서 고생했던 동료 견습들 얼굴이 하나씩 머리에 스쳤다. 견습 한 달 만에 나는 금수원 내부로 들어가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타사 기자들과 중계 차량이 오전 4시부터 속속 들어찼다. 경찰차 수십 대가 일렬로 늘어섰고 장비를 갖춰 입은 전경들 수천 명이 대열을 갖췄다. 어디선가 크레인 두 대가 나타나 굉음을 내며 금수원 정문 앞 도로의 가드레일을 뜯어냈다. 터질듯한 긴장감 속에서 오전 9시, 마침내 검경의 금수원 진입이 시작됐다.

“어, 이쪽이 아닌가?” 입구에서 나눠 준 프레스 완장을 왼쪽 팔에 차고 금수원 땅을 밟은 지 딱 10분 만에 나는 길을 잃었다. 낭패였다. 그도 그럴 것이 금수원은 너무나 넓었고 수색할 건물도 너무나 많았다. 샛길로 빠진 경찰 몇을 따랐다가 큰 길로 가던 기자들 대오를 잃었다. 한참 헤매다 기계실과 샤워실이 갖춰진 외딴 건물을 지나 계단을 오르자 큰 건물이 보였다. 지나가던 신도에게 물으니 대강당이라고 했다. 마침 구원파 측 대변인 한 명이 강당에 들어가고 있었다. 대강당이 수색의 메인이 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때다 싶어 따라 붙었다.

일각에 '지하 벙커'로 알려진 금수원 대강당 내부 지하 의무실. 기자인생 최초의 특종이었다.

내가 대강당에 들어오고 나서 5분쯤 뒤 검찰이 진입했다. 밖에선 전경들이 방패를 들고 인간벽을 치기 시작했다. 뒤늦게 올라온 기자단은 당연히 출입 금지였다. 수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한 타사 기자가 창에 비친 나를 보고 손가락질 하며 소리질렀다. “왜 저 기자는 들어가고 우리는 안 됩니까?” 나는 조용히 왼쪽 팔에 붙어 있는 프레스 완장을 떼서 바지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대강당에 진입한 기자는 나까지 총 셋. 발 닿는 모든 곳이 뉴스거리고 단독이었다. 그렇게 내 생애 최초 단독은 ‘지하벙커’로 알려진 금수원 대강당 내부 치과를 찍은 사진이 됐다.

유병언 회장 집무실 사진을 몰래 찍었다가 신도들에게 붙잡혀 삭제 당하고 땅을 친 일, 수색하다 말고 두 시간 넘게 낮잠 잔 검사들 허투루 넘겼다가 타 방송사 선배에게 특종을 넘긴 일. 신도들이 준 주먹밥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함께 들어온 선배 기자들과 이야기 꽃을 피운 일. 벌써 추억으로 윤색된 기억들이 견습 3개월 차에겐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현장에 기록자로 있다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는 마치 어제 일처럼, 아니 오늘 아침의 일처럼 생생하다. 대강당 한복판에서 가슴이 터질 듯이 뛰던 걸 잊을 수 없다. 나는 오늘도 현장을 꿈꾼다. [견습수첩]

김민정기자 mjkim7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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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후 경기 안성시에 위치한 구원파 본산 금수원 정문 앞에서 현장 스케치 중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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