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이 시대정신(Zeitgeist)이라 부르는 것은 실로 매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저자(著者) 양반들 자신의 정신이라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한 사회가 나가야 할, 그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정신적 태도와 이념이 시대정신이다. 시대정신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가치의 집약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말의 하나가 시대정신이다. 2년 전 대선 당시만 하더라도 복지국가, 경제민주화, 국민통합 등 시대정신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지만, 언제부턴가 시야에서 멀어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시대정신은 선거용으로 소비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 지 혼돈스러운 상황에서 시대정신은 밤하늘 북극성과도 같은 미래 좌표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현재적 시점에서 시대정신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시대의 불확실성에 있다. 국내적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시대정신인 산업화와 민주화가 갖는 유토피아적 에너지가 소진됐다. 민주화 시대가 가져온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의 양극화라는 역설적인 현실이 쓸쓸한 시대적 풍경을 이룬다. 쓸쓸함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불신으로, 다시 분노로 귀결된다.

보라. 우리 사회에서 분노하지 않는 세대가 어디 있는가? 2030세대는 청년실업과 구조조정에 분노하고, 4050세대는 퇴출의 공포와 노후 불안에 분노하지 않는가? 6070세대는 지나온 삶이 온당히 평가받지 못한다고 분노를 삭이고 있지 않는가? 누구나 참기 어려운 ‘분노의 사회’야말로 우리 사회의 현재적 초상이다.

지구적으로도 시대적 불확실성은 두드러진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에서 포스트신자유주의로의 체제 변동은 그 방향을 알기 어렵다. 2011년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점령 시위부터 최근 유럽연합(EU) 선거에서 나타난 극우정당의 약진에 이르기까지 통합의 구심력보다 분화의 원심력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국사회가 속한 동북아의 변동도 주목할 만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한국 방문, 북한과 일본의 관계 개선, 일본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에서 볼 수 있듯 동북아에선 새판짜기가 진행되고 있다. G2 시대의 도래에 대응할 대외정책의 모색은 우리 사회에 부여된 또 하나의 국가적 과제다. 미래를 예견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의 사회’야말로 세계사회의 현재적 초상이다.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시대정신이 더없이 중요해진 분노와 불확실성의 시대에 정작 시대정신이 실종됐다는 점이다. 밤하늘에 북극성이 없으니 망망대해에서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이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탐구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국민 다수가 원하는 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변화라면, 시대정신은 그 변화의 분명한 방향을 선사한다. 둘째, 갈수록 멀어지는 듯한 선진국 진입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위한 새로운 사회발전의 좌표에도 시대정신은 분명한 목표를 제공한다.

무엇이 새로운 시대정신이 될 수 있을까? 현재 우리 사회에 요구되는 세 개의 가치는 ‘혁신’, ‘공존’, 사회적 약자의 ‘보호’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시민적 대표성을 구현하기 위한 경제와 정치의 혁신, 상대방을 악마화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공존, 그리고 소수만 주목받고 다수는 무시되는, 다수 시민들의 삶의 질이 수면 아래 놓여 시야에서 사라진 ‘빙산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약자의 보호야말로 새로운 시대정신이 품어야 할 키워드들이다.

시대정신은 시민들이 발견하는 사회적 합의라는 점에서 특정 집단이 그것을 독점할 수는 없다. “소중한 친구여,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네. 그러나 삶의 황금 나무는 초록색이지.” ‘파우스트’에 나오는 또 하나의 유명한 구절이다. 민주화 시대의 황혼 속에서 우리 시민들이 새삼 발견한 것은 어떤 이념도 삶을, 인간을, 생명을 선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치사회든, 지식사회든, 언론을 포함한 공론장이든 인간적 가치를 실현할 시대정신에 대한 활기찬 토론을 열어가길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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