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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사들의 '아파트 울렁증'

입력
2014.07.1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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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아파트 브랜드로 잘 알려진 A건설사의 주택사업본부 임직원들은 몇 달 전 성대한 회식을 했습니다. 미리 계획된 자리가 아니었고 참석을 강요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날 모임은 “근래 보기 드문 훈훈한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 부서는 당시 존폐의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회사가 조직 개편을 위한 TF(태스크포스)를 꾸리면서 ‘주택사업 철수’를 안건에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몇 주간의 검토 끝에 이 계획은 결국 백지화됐습니다. 소식을 들은 임직원들은 안도의 눈빛을 주고 받으며 퇴근 후 모처의 식당에 모여들었습니다. 이날 회식은 일종의 자축연이었던 셈입니다.

이 얘기를 전해 듣고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아파트 브랜드 중 하나를 보유한 대형건설업체가 주택사업을 접으려 하다니,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건설사들에게 주택사업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으니까요.

우리나라 10대 그룹 가운데 건설사를 자회사로 두면서 주택 사업을 하고 있지 않은 곳은 GS와 계열분리한 LG그룹뿐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대기업을 등에 업은 그럴싸한 브랜드만 붙이면 분양을 받으려는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던 시절이 먼 과거의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도 나도 주택사업의 퇴로를 모색하는 실정입니다. 해외사업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대형건설사들의 경우 이 같은 경향이 더욱 강합니다.

대형 건설사들이 '주택사업에서의 철수'를 모색하고 있다. 사진은 모델하우스 분양현장으로 특정업체와는 상관없음.
대형 건설사들이 '주택사업에서의 철수'를 모색하고 있다. 사진은 모델하우스 분양현장으로 특정업체와는 상관없음.

표면적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선 건설사, 나아가 그룹 전체 이미지에 도움이 안된다는 평가입니다. 주택은 건설사 업무 가운데 유일하게 소비자들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B to 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사업인데, 그만큼 민원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건설사 사옥 앞의 단골 시위대 중 하나는 아파트에 불만을 품은 입주자 단체들이기도 합니다. 건설사 사옥이 그룹 본사와 떨어진 곳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가 큽니다.

물론 더 근본적인 이유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조금 복잡한 속내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건설사들이 주택사업으로 돈을 버는 데에는 선분양제라는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제도의 도움이 컸습니다. 선분양제는 모집공고를 낸 뒤 분양자들로부터 자금을 끌어모아 아파트를 짓는 일종의 예약판매제입니다. 건설사 입장에선 큰 돈이 없이도 대규모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제도입니다. 이런 특혜가 가능했던 것은 아파트 건설을 장려하는 정책적 취지가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대가 달라져 오히려 선분양제가 건설사들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분양만 하면 ‘완판’이 되기는커녕 입주가 시작된 후에도 고스란히 미분양으로 남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지요. 미분양 아파트는 제조업체로 치면 단순한 재고에 해당될 수 있지만 건설사에게는 투자금 회수가 안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월 수십, 수백억원의 이자 부담을 지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호시절에 건설사들을 주택시장으로 끌어들인 마법의 제도가 되레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입니다. 현재 미분양 물량들의 상당수는 선분양제를 믿고 덜컥 사업을 벌였다 수습을 못해 남겨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택사업 철수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곳은 많은데 정작 사업을 접기로 결정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잔치가 끝난 것 같기는 한데, 확실히 끝난 건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건설사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선분양제의 미혹(迷惑)이라 합니다. 과거의 달콤했던 향수에 취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음을 비꼬는 것이지요. 어찌됐건 우리가 비싼 돈을 들여 샀거나 임대해서 살고 있는 아파트들이 건설사들에게 골칫거리로 전락했다는 것 자체가 어딘가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게 사실입니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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