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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의 빈자리, 세월호가 앗아간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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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의 빈자리, 세월호가 앗아간 꿈”

입력
2014.05.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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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으로 이사와 잘살아보려 했는데 모든 걸 잃었어요

다정했던 모습 잊혀질까 매일 하늘공원 찾아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홍순영군 어머니가 27일 경기 안산시 상록구 하늘공원부곡공원묘지에 있는 홍군의 유골함을 찾아 습작노트를 보며 흐느끼고 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홍순영군 어머니가 27일 경기 안산시 상록구 하늘공원부곡공원묘지에 있는 홍군의 유골함을 찾아 습작노트를 보며 흐느끼고 있다.

“부푼 꿈을 안고 사업을 시작한 안산에서 낳은 막둥이가 저 애예요. 그런데 사업 실패로 남편은 건강을 잃었고, 유일한 희망이던 아들마저 하늘나라로 먼저 보냈어요. 밤이면 내 손 꼭 잡고 ‘마미, 좋은 꿈꾸세요’ 말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27일 경기 안산 상록구 하늘공원부곡공원묘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고 홍순영(17)군의 어머니 김모(54)씨는 아들의 유골함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눈물을 삼키며 애니메이션 작가가 꿈이었던 순영 군의 습작노트를 뒤적였다. 아버지 홍모(56)씨는 “뒷바라지 한 번 제대로 못해줘서 미안하다”며 아들의 사진을 연신 쓰다듬었다. 홍씨 부부는 아들의 유골이 안치된 지난달 23일부터 매일 이곳을 찾는다. 이달 12일에는 생일 케이크를 유골함 앞에 놓고 구슬픈 축하노래도 불렀다.

서울 광진구 건국대 인근에서 신발장사를 하던 홍씨 부부는 1996년 안산으로 옮겨 된장, 고추장, 만두 등을 식당에 공급하는 식료품 도매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번창했고, 이듬해 5월 12일 순영 군이 태어났다. 김씨는 “서른 일곱살에 낳은 막둥이라서 더욱 특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같은 해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그 여파로 부부는 사업을 접었다. 홍씨는 스트레스성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후 생계는 김씨 몫이었다.

순영군은 막내지만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지 않았다. 김씨는 “(순영이가) 초교 6학년 때 사준 패딩점퍼를 한 마디 불평 없이 고교 1학년 때까지 입고 다녔다”며 “다른 애들처럼 좋은 옷, 신발을 사주지 못한 게 한스럽다”고 했다.

그의 또 다른 후회는 “경비가 35만원이래. 비싸잖아. 여행비용 마련하느라 엄마가 고생하는 거 싫다”고 했던 순영군에게 “평생 추억이 될 것”이라며 수학여행을 권한 일이다. 사고 하루 전날 오후 10시, 순영군은 세월호 갑판 위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과 함께 “엄마, 나 잘 있음!”이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 짧은 한 마디는 아들과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됐다.

키 172㎝, 몸무게 100㎏의 후덕한 몸집만큼이나 순영군은 부모에게 살가웠다. 지난해 어버이날에는 월 3만원인 용돈을 조금씩 모아 커피를 좋아하는 어머니에겐 머그컵,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에겐 양말을 선물했다. 주말이면 아버지의 공원산책을 도왔고, 김씨와 외출할 때는 “마미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라며 팔짱을 꼈다.

안산의 한 연립주택에서 전세로 살았던 순영군은 한 가지 약속도 했다. “엄마가 텃밭에서 야채 키우는 거 좋아하니까 나중에 꼭 정원 있는 집에서 모시고 살 거야.” 하지만 순영군의 바람은 못다 핀 청춘과 함께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사고 발생 40여일이 지났지만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홍씨 부부는 세월호 뉴스를 접할 때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뛴다고 했다. 수면시간도 하루 2,3시간에 불과하다. 김씨는 “학교 수업이 끝나는 오후 5시가 넘으면 ‘마미, 나왔어’라며 순영이가 문 열고 들어올 것 같아 자꾸 대문을 쳐다보게 된다”며 “오전 6시 30분이면 사고 이전처럼 ‘아들, 아침 먹어야지’라는 말도 습관적으로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주하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가는 자식의 빈자리이고, 김씨는 “그래서 더욱 아들의 유골이 있는 하늘공원부곡공원묘지를 찾게 된다”고 했다.

작은 기억조차 놓치지 않으려는 듯 습작노트를 들추던 그가 눈물을 훔치며 나직이 말했다. “차갑고 밀폐된 배 안에서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해준 것도 별로 없는데, 매일 이곳에라도 와서 하늘나라에서만큼은 행복하길 빌어줄 거예요.”

안산=글ㆍ사진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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