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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진 칼럼/11월 12일] 배려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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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진 칼럼/11월 12일] 배려하는 마음

입력
2013.11.1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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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이 제법 추웠다. 사무실에 와서 뉴스를 살펴보니 서울의 이른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4도였다고 했다. 강원도 산간지방에는 영하 12도를 넘어섰다고 했다. 많이 추웠겠다. 히터가 켜진 차에서 졸다가 배려(配慮)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상대방에 대한 마음씀씀이 정도가 되겠다.

절영지회(絶纓之會)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 춘추시대 제후국가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내부반란을 진압한 뒤 공신들을 모아 밤늦도록 연회를 베풀었다. 특별히 애첩을 불러 시중을 들도록 했다.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졌다. 평소 왕의 애첩을 흠모하고 있었던 자가 어둠을 틈타 그녀에게 뽀뽀를 했다. 애첩은 순간 그의 한쪽 갓끈을 떼어내 쥐고는 왕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빨리 불을 밝히고 한쪽 갓끈이 없는 자를 잡아 벌하소서."

왕의 명령은 놀라웠다. "자, 오늘은 즐거운 날이니 모두 계급장(갓끈)을 떼고 흠뻑 마십시다. 갓끈을 계속 달고 있는 자는 혼을 낼 것이요." 그로부터 3년이 흘렀다. 진(晉)나라와 큰 전투가 벌어졌을 때 장왕은 적군에 포위돼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 때 단신으로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적의 화살을 몸으로 막으며 장왕을 구해낸 장수가 있었다. 목숨이 끊어져가는 그를 끌어안고 이름을 물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3년 전 연회에서 갓끈을 빼앗긴 놈이 바로 접니다."

왕과 신하 사이에만 있을 얘기가 아니다. 서넛 이상 모인 곳이라면, 수직적 서열이 존재하는 조직이라면 어디서라도 있을 법한 얘기다. 갓끈을 떼어 좌장에게 다가가 자신의 영민함과 순결을 과시하려는 애첩은 어느 조직에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수를 저지른 자를 배려하기 위해 '절영(絶纓)의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정무감각과 정치능력을 가진 좌장은 흔하지 않다.

요즈음 주변의 모임이라면 어떨까. 애첩의 귀엣말을 들은 좌장의 반응은 '고약한 놈, 누구에게 감히'이며, '빨리 촛불을 밝히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불이 켜지기도 전에 좌장에게 다가와 "△△님, 이럴 줄 알고 제가 미리 준비한 게 있습니다"하며 라이터를 내미는 부하도 있을 것이다. 갓끈을 빼앗긴 자는 색출되어 곤장을 맞거나 목이 달아났을 테고, 연회장은 추상같이 기강이 섰을 것이다. 물론 3년 후 목숨을 걸고 좌장을 구했다는 미담은 존재할 수 없다.

또 다른 좌장을 그려볼 수 있겠다. 우선 애첩의 신고를 묵살하느냐 마느냐의 고민에 빠진다. 애첩이 자신을 제후에 임명한 천자의 사돈팔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옆에서 라이터를 자랑하는 녀석은 그 애첩과 동향 출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불을 밝히라고 할 수도, 그냥 모른 척하고 있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 좌장이 지금도 애첩이 건네 준 갓끈을 만지작거리며 라이터 불꽃만 바라보고 앉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좌장의 목숨을 구한 아름다운 얘기도 물론 미완성이다.

추워진 날씨에 배려라는 단어를 생각했다가 절영지회 고사를 곱씹게 됐다. 상대방에 대한 마음씀씀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떳떳함이고 자신감이 아닐까 싶다. 떳떳함이 없는 경우엔 눈치보기로 변질되고, 자신감이 없는 경우엔 폭압으로 치닫게 된다. 좌우를 살피지 못하고 전후를 가늠하지 못해 눈치보기에 머물다 결국 폭압으로 마무리되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울산 아동 폭행치사 사건이나 축구계 여자선수 학대 파문 등 최근의 가정ㆍ사회문제에서, 지금의 정국상황에 이르기까지 배려의 실종이 빚는 부작용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앞서 고사에서 절영의 배려가 '내가 그의 잘못을 모른 척하면 나중에 그가 나의 목숨을 구해주겠지'하는 심오한 계산으로 한 행동일 리는 없다. 하지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은 반드시 누군가로부터 어디선지 몰라도 자신에 대한 배려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보답을 위한 계산된 행동이거나 설사 마지못해 하는 것이라도 배려하는 마음과 자세는 마냥 좋을 뿐이다. 떳떳함과 자신감을 쌓아야 한다.

정병진 주필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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