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은 부질없지만, 만약 MB 첫 해에 촛불시위가 없었다면? 아마 훨씬 괜찮은 대통령이 됐을 것이다. 안전장치를 대폭 제거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은 집권 석 달도 안된 이명박 정부를 기초서부터 허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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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시의 촛불은 지나쳤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누구 말대로 "로또 1층 당첨 뒤 벼락맞을 확률"보다도 낮은 게 사실이었으니까. 어떻든 진보정권의 붕괴로 속 앓던 이들에게는 제대로 걸려든 한 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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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MB정부는 급속히 힘을 잃었다. 뭘 해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선거 전엔 호의적 여론이 더 많았던)대운하는 4대강 사업으로 축소했어도 지지를 받지 못했고, 시대흐름으로 보였던 공공부문 민영화도 좌초했다. 국제금융위기 첫 극복도, 외교무대에서의 몇 성과들도 별 것 아닌 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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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정치의 부재'였다. 집권 초 MB는 득의만만하게 얘기했다."국민이 나를 뽑았다. 더 이상 좁은 시야로 보지 말라. 내 상대는 (국내 정치인이 아니라) 전세계 지도자들이다." 정치의 단절, 소통의 단절 선언이었다. 결국 그게 MB정부를 망쳤다. 정치과정이 생략된 쇠고기 수입 강행이 실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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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분출의 기회를 찾는 박근혜 비판진영의 한(恨)은 그 깊이와 크기가 일방적 선거였던 MB 때와는 비교할 바도 아니다. 인사실패 등으로 몇 번 고비가 있었지만, 북핵 위기가 분출을 막는 마개 역할을 했다. 이제 그 마개 효과도 다한 차에 심상치 않은 에너지가 자꾸 쌓여가고 있다. 그래서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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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근이 된 국정원 댓글 사건은 쇠고기처럼 돌발도 아닌, 열 달이나 방기돼온 사안이라는 점에서 더 기막히다. 대통령이 초기에 "전 정권의 일이지만 분명 잘못됐다. 대신 사과한다. 법대로 엄정 처리하겠다"고 했으면 그만일 일이었다. 그게 국민에 대한 정직한 소통이고, 야당에 대한 존중의 정치였다. 그랬으면 추가 의심정황들이 나왔어도 크게 일이 번지진 않았을 것이다. 민심이란 한번 김이 빠지면 같은 소재로는 쉬 재충전 되지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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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피해가려 들면서 채동욱 문제가 불거지고 급기야 검찰조직 위아래가 치고 받는 일까지 벌어졌다. 정부가 대검 중수부를 폐지하면서까지 공언한 게 검찰개혁이었다. 서울중앙지검장 입에서 "야당 도와줄 일 있냐"는 말이 나온 순간 검찰개혁은 깨끗이 물 건너 갔다. 더 이상 누가 검찰의 정치중립을, 정부가 말하는 법과 원칙의 진정성을 믿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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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일찌감치 복지공약에 대한 기대도 훼손됐다. 야심 찬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도 묻히고, 앞서 미중 외교나 전두환 추징금 환수 같은 꽤 괜찮은 성과들도 벌써 가물가물해졌다. 잘못하면 창조경제나 경제민주화 등 여러 핵심정책들도 자칫 동력을 잃어갈 것이다. 5년 전 MB정부가 촛불에 치인 뒤에 그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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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지금의 댓글 국면은 진짜 첫 위기다. 관여하지 않았으니 사과할 것 없고, 시비의 빌미를 줄 필요 없다고 뭉개다 일을 키웠다. 생각도 못했던 정통성문제까지 슬금슬금 나오고 있지 않나.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나서 국민과 야당에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지 않으면 안될 긴급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첫 단추를 잘못 꿴 뒤로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게 그나마 손실을 줄이고 초심으로 다시 시작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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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제에 박 대통령도 정치 인식을 근본적으로 다듬을 필요가 있다. 정치는 원칙을 허무는 야합이 아니라, 우회 해서라도 끝내 목표에 근접하는 길을 찾아가는 번거로운 과정이다. 정치를 배제하면 결국 제 목표에 도달할 수 없음은 이전 정권들이 분명하게 가르쳐준 실증적 교훈이다. 그래서 어쩌면 절호의 수습 기회였을 지난 달 야당대표와의 만남을 그런 식으로 흘려버린 건 두고두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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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과거에서조차 왜 배우질 못 하는가. 정권마다 잇단 실패에 국민들은 진저리가 나있다. 귀중한 첫 일년을 이런 식으로 또 허망하게 보내서는 정말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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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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