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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9월 25일] 문제는 정치의 격(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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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9월 25일] 문제는 정치의 격(格)이다.

입력
2013.09.24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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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필요도 없지만, 정치에도 격(格)이 있는 법이다. 품격 품위 같은 것일진대, 사실 우리 현대사에서 이런 걸 따지는 게 부질없을 지도 모르겠다. 국가ㆍ국민 형성부터 급했던 건국 초나 이후 오랜 권위주의 시대에는 정상적 정치가 존재할 여지가 없었으니까.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지도자 대부분이 음모와 술수, 반칙이 난무하는 정치환경 속에서 성장한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정권마다 짧은 집권기에 쫓긴 급한 성취의 강박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소한 일에도 매사 백병전 벌이듯 하는 정치문화에서 품격은 한가한 얘기였다. 도리어 언행은 거칠고 모질수록 상대를 제압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이 점에서 정치인 박근혜는 좀 달랐다. 물론 아버지의 후광이 크긴 했지만 차분한 용모, 절제된 언행, 단호한 리더십, 원칙주의 등으로 해서 그는 진흙탕 정치인들과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무엇보다 크게 억울했을 2007년 경선 패배 승복은 그의 다른 격과 급(級)을 깊이 각인시킨 계기가 됐다.

그래서 그는 졌으되 패자가 되진 않았다. 지난 대선 전 상대진영이 가장 크게 걱정했던 것도 이 대목이었다. 참여정부의 실정이 무조건 MB를 선택케 했듯, 그에 못지 않았던 MB에 대한 염증대로라면 정권 재창출은 애당초 가능한 게 아니었다. 선거결과 분석이 구구했으나 역시 결정적 요인은 박근혜에게서 떠올려지는 '격이 다른 보수'에 대한 기대로 보는 게 옳다.

초기 인사실패 등 잦은 구설에도 박 대통령에 대한 꾸준한 지지율 상승은 근래 전임자들의 같은 시기와 비교해 확연히 달랐다. 원칙대로 차분히 북한문제를 다루는 솜씨로 악재들을 덮었다. 특히 대중(對中)관계 호전을 비롯한 정상외교 성과는 우리 국가위상 못지않게 분명히 그의 개인적 품격에 힘입은바 컸다.

그런데, 요즘 들어 처음으로 지지율이 꺾이는 기미가 나타나고 있다. 추석 전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지는 추세다. 다른 일은 없었다. 경제민심이 나쁘다고 하나 언제 명절에 살맛 난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던가. 다만, 지겹도록 끄는 국정원 문제가 있을 뿐이었다. 모든 건 여기서 비롯됐다. 검찰총장 혼외자 논란 같은 3류 스캔들이나 불통의 3자 회동도 다 그 연장선이다.

초기에 "비록 전임기의 일이었지만 국가정보기관이 해선 안 될 일이었다"고 선선히 유감을 표하고, 강도 높은 개혁만 공언했으면 일찌감치 정리될 사안이었다. 그게 박근혜의 격, 그가 상징하는 '격이 다른 보수'에 합당한 처사였다. 아무리 봐도 정통성에까지 미칠 사안은 아니었는데도 뜻밖의 어정쩡한 대처로 판이 커지고 늘어졌다.

검찰총장 혼외자 논란은 국정원 문제의 첫발을 잘못 디딘 탓에 스텝이 연달아 꼬인 케이스다. 구질구질한 개별 정황들에 대한 각자의 판단이야 어떻든, 적어도 일련의 과정에서 풍기는 음습한 음모와 치졸한 술수의 악취만큼은 아무리 둔감한 이라도 맡지 못할 리 없다. 이걸 공직자의 도덕성과 업무수행 문제로만 돌리려 드는 건 익숙하고도 뻔한 패턴이다.

거듭하지만 아직은 실력평가가 이른 박 대통령에게 당장의 가장 큰 자산-그게 실체든, 허상이든-은 과거 정치지도자들과는 여전히 뭔가 달라 보이는 격이다. 이 이미지를 잃는 것은 이 정부의 중요한 기반을 잃는 일이다. 최근 지지도 반전은 폭이 크진 않다 해도 이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위험한 조짐으로 봐야 한다. 다를 줄 알았는데, 별반 다르지 않다는.

눈 앞의 이해와 득실에 따라 쉽게 법과 원칙을 저버리는 정치공학적 셈법은 지긋지긋하게 보아온 바다. 그러므로 박 대통령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이런 계산에나 능한 격 낮은 과거형 인물들을 주변에서 걷어내고, 국정원이나 검찰총장 문제를 원칙으로 되돌림으로써 많은 이들이 기대했던 본래의 격과 급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실 야당이나 진보진영 입장에서도 '격을 갖춘 보수'만큼 난감한 상대가 어디 있겠는가.

이준희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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