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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진 칼럼/9월 3일] 정체성 걸린 불공대천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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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진 칼럼/9월 3일] 정체성 걸린 불공대천 승부

입력
2013.09.02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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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동네에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하필 정문 앞에 이상한 유흥업소가 들어섰다. 신도들은 그 유흥업소가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수 차례 이전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한 신도들은 기도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그들은 매일 교회에 모여 목사님과 함께 "저 업소가 우리 눈 앞에서 보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며 기도를 했다. 어느 날 그 업소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고 업소는 사라져 버렸다. 신도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이뤄졌다며 기뻐했다. 나중에 이를 전해들은 업소 주인(하나님을 믿지 않음)은 화가 났고, 화재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합의가 이뤄질 리가 없었고, 교회 목사와 업소 주인은 결국 법정으로 나가 재판관 앞에 섰다.

재판관이 먼저 업소 주인에게 물었다. "신도들의 기도 때문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기도의 응답이 있었다고 믿습니까?" 주인의 대답은 명확했다. "믿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화재의 원인입니다." 재판관이 이번엔 교회 목사에게 물었다. "신도들의 기도 때문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기도의 응답이 있었다고 믿습니까?" 한동안 망설이던 목사는 "…, 믿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얼마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NLL 대화록'을 둘러싸고 여야의 공방이 한창이었던 시기 어느 목회자가 들려준 이야기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반박하고 뒤집으려는데 열중하다 보면 본질적 정체성을 부인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설명도 해주었다.

당시 NLL 대화록의 내용이 알려졌을 때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공방과 결과를 보자. 새누리당은 노 전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NLL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반면 민주당은 NLL은 당연히 지킨다는 것을 전제로 주변 영역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NLL 대화록 내용이 알려졌을 때의 여론조사 결과 절반을 조금 넘는 국민은 그것이 NLL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라고, 절반에 못 미치는 국민은 그것이 NLL을 포기한 발언이라고 판단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남북정상회담에서의 약속은 이명박 정부를 거쳐 박근혜 정부에서도 그 효력은 이어지는 게 원칙이다. 새누리당의 주장에 따른다면 지난 정부가, 그것도 대통령이 직접 NLL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NLL 포기의 당위성을 끈질기게 주장하는 셈이었다. 당연히 민주당은 그 반대의 입장에 서는 결과가 됐다. 더 이상의 논란은 무의미하거나 자칫 대한민국에 해를 끼치는 쪽으로 갈 수 있는 형국이었다.

그런 황당한 결과로 흐르게 된 이유는 명백하다. 노 전 대통령을 둘러싼 정치적 사심(私心) 때문이었다. 그를 '이완용 급의 매국노'로 부각시켜 이익을 챙기려는 쪽과, '알고 보면 그는 애국자'라는 점을 인식시켜 반대급부를 얻으려는 쪽이 본질을 외면한 채 순간의 승부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의 입장을 굳혀내기 위해선 판단의 근거를 '원인 불명'으로 남겨놓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당사자가 사망했고, 북한이 침묵하는 상황에선 양쪽의 주장들이 유일한 근거일 뿐이었다. 온 나라를 뒤흔든 NLL 녹취록 사건은 마치 양쪽이 합의라도 한 듯 유야무야 돼버렸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혐의 사건에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돼 있다. 대명천지에 아직도 그러한 세력이 있다는 사실에 위기와 분노를 느끼는 국민도 있고, 옛 국정원의 형태를 떠올리며 "지금이 '석기 시대'인가"하며 의아해 하는 국민도 있다. 33년 만에 처음 보는 사건이라 판단도 많고 평가도 다양하다. 가장 경계해야 할 대목은 역시 정치적 사심이다. 승부에 집착하다 보면 본질을 놓치게 되는, 본말이 전도되는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이번 사건은 사법적 결론이 어떻게 나든 국정원과 통합진보당은 결코 이대로 둘 다 공존할 수는 없게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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