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자 조간신문들에 재미있는 평양 조선중앙통신발(發) 사진이 실렸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현지지도 모습이다. 우산 쓴 김정은을 둘러 싼 군 간부들이 하나같이 수첩을 들고 '말씀' 한 마디라도 흘릴세라 열심히 메모하고 있다. 체제 경직성을 보여주는 딱한 풍경이다.

실소하다 퍼뜩,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머쓱해졌다. 얼마 전 정홍원 총리가 한 마디 했다. "받아쓰기 좀 그만하고 의견을 나눕시다. 정수리 아닌 눈을 보고 회의를 합시다." 앞서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도 같은 얘기를 했다. 다들 자체 회의에서 한 말이지만 이게 이 정부 전반의 분위기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도 다르지 않다는 게 여러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모두 책상에 코를 박고 매번 200자 원고지로 5,60장 분량의 방대한 말씀을 받아 적느라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필기해본 지 까마득한 나이에 손아귀가 아프지나 않을지 걱정될 정도란다.

원인은 물론 박 대통령에게 있다. "어려운 집 어린이들이 돈 안들이고 영어공부 할 수 있게 EBS를 이용하거나, TV 프로그램에 자막을 넣어 제공해도 좋을 겁니다." 온갖 세세한 구석까지 구체적으로 집어 얘기하니 흘려 넘길 도리가 없다. 빡센 수업 마치고 허겁지겁 사무실에 돌아가면 내준 숙제 하기에도 정신 없을 것이다. 이런 주입식 방식에서 책임행정이 가능할 리 없다. 하물며 창조적 발상이야.

가능하다면야 대통령이 일일이 챙기는 걸 뭐랄 건 아니다. 문제는 그 많고 다양한 아웃풋을 가능케 하는 인풋에 대한 의문이다. 도대체 대통령 수첩에 그 세세한 내용들이 다 어떻게 씌어지는지 불가사의한 것이다. 자칫 정상 시스템보다, 소수의 집사급 보좌진 몇몇에 의해 인풋이 좌지우지되지 않을까 염려도 된다.

정부출범 100일을 앞두고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50% 남짓이라는 조사결과들이 나왔다. 같은 시기 무려 90%에 달했던 YS나, 60% 전후의 DJ에는 크게 못 미치나 40% 안팎의 노무현이나, 20% 수준의 MB에 비해서는 꽤 나은 편이다. 윤창중 사건 같은 대형 악재에서도 대선 당시 지지율을 거의 회복했으니 선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달리 읽힌다. 부정평가의 압도적(46%) 이유가 '인사 잘못'이고, 긍정평가의 가장 큰 이유는 그저 '열심히 한다'(23%)다. 전자는 내내 지적됐던 독단, 불소통과 직결된 불만이고, 후자는 그저 막연한 기대감의 표현이다. 불만은 구체적이되, 수긍은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다.

개인적으론 현 정부가 안보위기나 대북 문제, 한미관계 등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해온 점을 평가하는 편이다. 경제에서도 성장목표와 경제민주화 사이에서 아직은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지만, 추경 등을 통해 당면 현안들에는 웬만큼 대응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 분위기도 이전 정권과 비교해 과히 나쁘지 않다.

그러나 집권 초임을 감안하면 크게 부족하다. 무엇보다 이 시기면 응당 흘러 넘쳐야 할 변화의 활력이나 신선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겨우 100일 밖에 안됐다고?" 많은 이들의 반문에는 마치 오래된 정권에서와 같은 늘어진 느낌이 깔려있다. 이 또한 지나치게 통로가 제한되고 절제된, 그래서 빈약한 정책과 정보산출이 활력을 죽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인은 다 같다. '창조'를 표방하면서도 왕성한 토론과 자유로운 발상을 억제하는 박근혜식 통치문화가 그것이다. 혼자 모든 걸 감당하려 드는 리더십은 지금 한국에선 가능하지도, 유효하지도 않다. 무서운 선생님의 말을 받아쓰기에만 여념 없는 조용한 교실. 이게 겨우 100일 된, 그러나 왠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박근혜 정부의 느낌이다.

출발이 창대한 정권일수록 끝이 별로 좋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지금 이런 야박한 평가가 좋은 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잘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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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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