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람들은 우리에게 친근감을 드러낼 때면 '일의대수(一衣帶水)'라는 표현을 쓴다. '옷에 걸친 하나의 띠처럼 좁은 물'이란 의미다.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양자강 이남을 향해 '허리띠만한(?) 강물 때문에 서로 모른척하며 지낼 수 없다'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한중 수교 이후 각종 교류행사에서 의레 그들로부터 듣는 말이다. 2012년 수교 20주년을 맞아 방한했던 중국대표단 단장도 인사말에서 서해를 '일의대수'에 비유하며 "먼 친척보다 이웃이 더 좋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사업이나 장사를 하는 화교의 집이나 사무실에선 '일의대수'라는 족자를 흔히 볼 수 있다. 이웃사촌처럼 이해하고 협력하며 서로를 신뢰한다는 다짐이다. 그런데 최근 국내 화교들은 물론 방문객들이 우리를 대하는 눈치가 예전만 못하다. 그들이 몹시도 기대했던, 우리가 철석같이 약속했던 일산차이나타운 건설이 갑자기 없었던 일로 돼 가기 때문이다.

경기 고양시에 건설 예정이었던 국내 최대 차이나타운 자리에 재벌기업의 대형할인매장이 들어설 모양이다. 간략한 경위는 이렇다. 2002년 한중투자협력위원회 합의에 따라 2004년 고양시가 차이나타운추진위에 호수공원 옆 부지 1만3781㎡를 불하한다. 추진위가 문화타운을 건설하던 중 자금난에 봉착, 2009년 공정률 38.1% 상태에서 공사가 중단된다. 3년 뒤 L쇼핑이 토지 및 시설을 매입한다. L쇼핑은 현재 이 자리에 대형할인매장 건설을 진행하고 있다.

한중 당국자간 합의로 시작됐던 차이나타운이 재벌기업의 쇼핑몰단지로 변질되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땅 주인이었던 고양시의 탈법이나 위법이 있었는지, L쇼핑과의 계약에 하자가 있었는지, 추진위가 엉뚱한 잘못을 했는지는 조만간 밝혀질 것이다. 투자자 단체와 화교들이 이와 관련된 감사를 경기도에 청구했기 때문이다.

법적인 잘잘못 유무는 오히려 부수적인 문제로 보인다. 한중 수교 10주년이었던 2002년 우리 정부는 국내 화교들의 100년 숙원인 영주권문제를 해결해 주었고, 이를 계기로 양국간 교류협력은 큰 전기를 맞았다. 일산차이나타운 건설은 이러한 우호의 상징이었다. 첫 삽을 뜨는 자리에는 싱가포르와 타이완 당국자들도 참석해 한중 관계 발전을 축하했고, 중국 대표는 일제시대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일화를 회상하며 몇 번이나 "늦었지만 고맙다"고 말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당시 고양시는 부지의 사용목적까지 한정하여 계약을 체결하면서 '차이나타운 외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계약을 해제하겠다'는 조항을 명문화 했다. 그런데 사정이 바뀌었다. 2005년 인근에 킨텍스가 들어서면서 애초 황무지 같았던 부지의 땅값이 몇 배로 상승했다. 지지부진한 차이나타운 건설보다 재벌기업의 대형쇼핑몰 유치가 눈앞의 이익을 훨씬 많이 가져다 줄 것은 뻔한 이치였다. 지자체로서는 크게 구미가 당기는 '변절'이 아닐 수 없었을 게다. L쇼핑으로서도 차이나타운을 위해 진행된 공사 38.1%쯤이야 파헤치고 허물어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판단을 했음직하다.

지자체와 재벌기업이 재정적ㆍ경제적 효율을 추구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편법과 탈법이 있어서는 안되며, 무엇보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엔 상응한 명분과 설득이 있어야 한다. 이웃 국가와의 약속을 어길 경우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잠시 문제가 생기고, 약간 창피를 당하더라도 나의 이윤만 극대화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국제사회로부터 미움과 따돌림을 당하는 우리의 이웃들을 지겹도록 보고 있지 않은가.

10년 전 한중 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았을 때, 한국이 100년 만에 번듯한 차이나타운을 만들겠다고 발표했을 때, 그들은 '일의대수'를 연발하며 큰 기대에 부풀었다. 서해를 허리띠 정도의 장애물로 여기고 "역시 이웃사촌 밖에 없다"며 손을 내밀었던 이웃에게 배신감을 안겨서는 안 된다.

정병진 주필 bjjung@hk.co.kr

인기 기사

api_db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