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미 대선후보 경선에서 미트 롬니가 뉴욕을 비롯한 5개 주를 모조리 석권하면서 사실상 공화당 후보로 결정됐다. 아직까지는 필요한 대의원수의 3분의 2만 확보한 상태지만 경쟁자인 깅그리치나 샌토럼 후보 모두 더 이상 경선을 계속할 동력을 잃었다. 첫 출발선이었던 아이오와 코커스 이후 석 달여만이다.

이제 롬니 후보는 11월 대선까지 오바마 대통령과 길고 긴 진검 승부를 펼쳐야 하지만 이미 싸움은 출마를 선언한 지난해 6월, 대선을 1년 6개월이나 남겨둔 시점부터 시작됐다. 성공적인 벤처기업가와 올림픽조직위원장, 주지사로 일찌감치 알려졌던 그도 출마선언 후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온갖 시시콜콜한 검증 도마에 올랐다.

감세, 재정긴축 등 정책 검증은 기본이고 자잘한 납세 지연신고부터 말 바꾸기, 상황에 따른 얕은 처신, 빈 라덴 제거 작전에 대한 비판 발언까지 일거수일투족 모든 게 시비논란에 올랐다. 공화당 후보가 된 만큼 앞으로 반년 간 그는 지금까지와는 또 비교도 안될, 때론 치사하기 이를 데 없을 비판을 견뎌내야 한다.

우리 대선 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사례는 2002년 노무현의 당선이다. 그 해 3월 민주당 광주경선에서 기라성 같은 호남후보들을 제쳤을 때 다들 경악했다. 20년 동안 국회의원과 최고위원, 장관을 거친 익숙한 인물이었지만 그는 뜻밖의 바람이었다. 국민이 일반 정치인으로 보는 눈과 대통령직을 염두에 두고 보는 시각은 완전히 다른 때문이다. 이후 대선 때까지 아홉 달 동안 그 역시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쳤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의 아버지가 아들을 대신해 안개를 걷었다. 요약하면 딱 한마디, '경선 없는 대선 출마'다. 민주당 대선후보가 확정된 뒤 야권 후보단일화 방식이다. 정치일정에 따라 최대한 급히 움직인다 해도 그가 마침내 현실의 대통령 감으로 드러나는 시기는 빨라야 가을이다. 줄다리기가 여의치 않으면 더 늦어질 것이고, 혹 야권의 세 불리가 현저하면 버틸 만큼 버티다 10년 전 노무현-정몽준처럼 막판 극적 타결을 상정해볼 수도 있다.

문제는 지난 해 가을부터 불어 닥친 안철수 바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작 그에 대해 더 알게 된 게 없다는 점이다. 그 동안 대통령 자질로 판단할 어떤 정보도 추가되지 않았다. 좋은 머리에 연구자와 기업인으로서 괜찮은 성취, 모범적인 태도, 온화하고 순수해 보이는 얼굴 등 딱 처음 그 이미지 그대로 멈춰있다. 대통령으로서 그가 만들고자 하는 나라의 모습은 여전히 윤곽이 잡히지 않는다.

물론 말을 더 하긴 했다. 대표적인 게 이런 것들이다. "원칙은 손해를 감수하며 지킬 때 의미가 있다." "현실에 중심을 두고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지금 우리에겐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가 필요하다." 고매하지만 뜬구름 잡는 언어들이다. "(우리 경제구조는) 대기업이 독점적 권리로 중소기업 이익을 빼앗고 창업의 새싹도 짓밟는 구조" 등 현실 언급도 있지만,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각론은 기억에 없다. 국가지도자를 뽑는 일이 마을의 훈장 고르는 것과는 다를진대.

이미 대선 레이스는 시작됐다. 죽을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한 주자들은 결승선에 가까워갈수록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막판에 말짱한 몸 상태로 끼어들어 승리를 낚아채갈지 몰라 전전긍긍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주자들은 벌써 오랜 준비과정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여러 한계가 노정된 이들이다. 안철수의 게임은 정치공학적으로 가장 승산 높지만 제대로 실력을 판단할 기회를 원천 봉쇄한다는 점에서 가장 비겁한 불공정 게임이다.

안 교수가 자주 강조하는 소신이 상식과 정의다. 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령놀음은 이제 그만하면 됐다. 빨리 현시(顯示)하든 않든, 지나치게 계산기를 오래 끌어안고 있는 건 그에게 남다른 기대를 걸고 있는 국민들에게 차마 보일 태도가 아니다.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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