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이럴 것 같았다. 서울대공원 돌고래 쇼 중단에 이어 청계천 관광마차에도 시비가 붙었단다. 말에게 무거운 승객들을 끌고 빛과 소음, 오염 속 도심의 딱딱한 아스팔트를 달리게 하는 것도 동물학대라는 것이다. 예전 아이와 돌고래 쇼를 보며 즐거워하던 기억이 슬며시 부끄러워지던 차에, 관광마차에 이르러서는 죄책감마저 들 지경이다. 아, 내가 이토록 인정머리 없는 모진 인간이었단 말인가.

문외한이지만 돌고래가 사람보다 큰 뇌로 교감하며 감정을 느끼는 똑똑한 동물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런데도 하루 4~5차례 공연의 중노동과 좁은 수조에서 느꼈을 스트레스에 무심하고, 또 퇴근길 마차 끄는 '갑돌이'의 애닯은 눈망울을 보면서도 그가 얼마나 힘들고 발이 아플지 생각 못했다니.

그런데 자책 끝에 스멀스멀 의문이 피어 오른다. 그럼 동물원 다른 우리에 숱하게 갇혀 있는 동물들은 뭔가. 좁은 환경으로 말하자면 맹수들도 못지않다. 자연에서 호랑이의 하루 이동거리는 20km에, 필요면적은 서울시의 3분의 2쯤이나 된다. 드넓은 청천을 머리에 이고도 철망 속 횃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하늘의 제왕 맹금류들은? 아니, 평생 중노동 끝에 도살장 앞에서 눈물 흘리는 소의 착하고 슬픈 눈은 외면해도 좋은가.

동물도 생명이므로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문제는 헷갈리는 기준이다. 돌고래처럼 머리 좋은 순서도 아닐 테고, 개체수의 다소나 인간과 가까운 순서인 것 같지도 않다. 걸핏하면 외래종 물고기, 개구리 따위를 잡아죽이는 걸 보면 동물 보호에서도 해외이주민은 차별 받는 존재인 것 같기도 하다. 더 나아가 꼬마들 여름방학마다 채집숙제용으로 온몸에 철핀이 꽂히는 고통으로 죽어가야 하는 온갖 곤충들은 생명이 아닌가?

결국 동물 보호의 기준은 그때그때 인간의 필요와 감정에 따른 상대적 잣대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 중심의 이기적, 자의적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연보호의식도 현대에 들어 지나친 자연파괴행위가 인간 스스로의 삶을 위협하게 됐다는 자각이 생긴 뒤에야 일반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돌고래 제돌이 문제도 결정 전에 좀더 폭넓고 솔직한 논의를 해야 옳았다. 다양한 동물에 대한 근접경험이 자라나는 세대의 생명체에 대한 인식과 태도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포함, 명분과 사회적 실익을 진지하게 따져볼 기회를 가졌어야 했다. 돌고래 쇼 문제는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오랫동안 일반이 당연히 받아들여온 정서적 환경을 박탈하고 많은 이들의 추억마저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결코 작은 사안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 행정을 맡았다고 해서 이런 문제를 제 개인적 선호대로 단칼에 결정하고 일방 통보하는 것은 월권이다.

이게 절대명분이 갖는 맹점이다. 동물 보호의 명분인 '생명에 대한 외경'도 막상 들여다보면 숱한 모순에다 현실에서의 일반 적용이 가능하지도 않다. 그래도 명분의 지순함 때문에 누구도 정면으로 항변하기는 힘들다. 지금은 한편의 소극이 된 7년 전 도룡뇽 살리기 법석이나 최근 제주해군기지 인근의 붉은발말똥게, 맹꽁이 소동도 같은 맥락이다.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다 보면 `자칫 위선에 빠지고, 정의를 독점한 듯 착각하는 배타적 근본주의, 교조주의의 오류에도 빠져들게 된다. 대단히 조심스러운 인용이지만 일제가 조선지배를 위해 유포한 다카하시 도루의 에서 우리의 부정적 특성으로 맨 처음 지적된 것도 유난스런 명분에의 집착이었다.

절대명분은 워낙 선명하므로 완강한 극단으로 흐르기 십상이고 이렇게 되면 현실에서 타협과 조정, 관용, 상대주의 등 민주적 가치가 작동할 여지는 현저하게 좁아진다. 유독 우리가 심하게 겪는 독한 대립과 갈등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돌고래 논란 한 켠에서 뜻밖에도 보이는 건 우리사회를 감싼 근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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