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기억이 가물가물할 테지만 전 정권에서 대통령 씹기는 시쳇말로 '국민스포츠'였다. 술자리나 인터넷공간은 물론 외지(外紙)에서 "한국신문들은 대통령을 자주 정신병자로 일컫는다"고 했을 만큼 이른바 정통 보수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정권 후반엔 진보좌파 진영도 합류했다. 그의 사후 대중정서가 반전되는 걸 보면서 부랴부랴 사과문들을 써댔으니까.

이명박 대통령도 꼭 닮은 길을 가고 있다. 어디서건 그에게 우호적 발언을 들어본 기억이 아득하다. 먹고 살기 힘들고 짜증나는 일상이 죄다 그의 탓이다. 그런데 같이 욕을 먹어도 사정은 MB 쪽이 훨씬 나쁘다. 참여정권에선 소수의 동지그룹이 끝내 남았으나 MB에겐 그마저도 없다. 정의(情誼)적 연대감 없이 대개 이해관계로 엮인 정권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벌판에서 홀로 바람을 맞는 상황이다.

일상대화의 공공화가 성공요인

기자들은 비판을 '조진다'고 위악적으로 표현한다. 제대로 조지는 건 마땅히 기자의 본분이자 보람이다. 그러나 대상의 처지가 궁색해지면 아무래도 의욕이 떨어진다. 비판이 일상화하거나 건드려 되튀는 맛이 없어져도 마찬가지다. 지금 딱 그렇다. 언론의 주 비판대상이 박근혜, 박원순, 안철수 등으로 일찌감치 바뀐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이야말로 살아 있는 권력이자 갈수록 힘이 커질 조질 맛 나는 대상이다.

그런데도 줄기차게 힘 빠진 MB와 주변을 무자비하게 조져대는 매체가 있다. 다. 공교롭게도 4ㆍ27 재보선으로 MB의 추락이 만천하에 확인되던 날 첫 방송이 시작됐다. 이 방송의 조롱과 희화화가 어떤지는 다 들어봤을 터이므로 굳이 언급할 것도 없겠다. 상투적인 '가카 비판'에 새삼 관심 갖게 하려면 애당초 통상의 수위로는 어림도 없다. 더욱이 한창 때가 아닌 지금엔 누구에게든 별 용기도 필요 없는 일이다. 제작자는 "쫄지 않고 말한다"는 걸 자랑하지만 가카에게 대놓고 쌍욕이라도 하지 않는 한 쫄아야 할 상황은 아니다.

최근에 사고를 친 '눈 찢어진 아이' 논란은 진보학자 진중권의 말대로 이런 태생적 한계상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다. 사실과 소설을 한 덩어리로 섞으면 그 안의 소설은 사실로 인식되는 법이다. 제작자는 "언론도 추론을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적어도 팩트(fact)에 기반한 추론과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도 되는 소설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그러므로 나꼼수를 성공으로 이끈 건 비판의 참신함이나 강도(强度)가 아니다. 제작자의 탁월함은 누구나 일상에서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대화를 처음으로 공공매체로 끌어낸 기발한 발상의 전환에 있었다. 마치 술자리에서 친구의 거침없는 수다를 듣는 듯한 시원함, 그걸 공공매체를 통해 듣는 신기함과 아슬아슬함 등 포맷 자체가 열광의 요인이다.

이렇게 보면 나꼼수 자체는 죄가 없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키워져 온 깊고 큰 불만과 분노를 외면하고 방치해왔다는 점에선 정치권에 책임이 있고, 이를 반영하거나 어떠한 출구조차 만들어주지 못한 건 기존 언론의 책임이다. 안철수ㆍ박원순 현상과 정확히 맥이 같은 미디어판 변주다. 거북하고 불쾌하지만 큰 틀에서 사회 전체가 반성하고 감당해야 할 현상이다. 물론 '눈 찢어진 아이' 논란처럼 개인과 공공영역의 경계를 무너뜨린 데 따른 부작용(핵심은 책임성의 부재다)은 제작진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영향 커진 만큼 책임도 인식해야

정작 주목해야 하는 건 성격상 보완적 기능에 합당한 나꼼수가 웬만한 주류 미디어 이상의 위상으로 나날이 그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는 현상이다. 세상을 음모적 시각으로 재단하고 무책임한 서사와 조롱, 편파적 인식이 정상인 양 받아들이게 하는 건 우리가 지향하는 어떤 사회에도 도움되지 않는 독이다. (혹, 요즘 잦은 여당대표의 경박한 언어습관도 나꼼수 인기 영향은 아닐지) 그러니 이만큼 영향력이 커졌으면 앞으론 사회에 대한 다양한 책임을 좀더 진지하게 고민하기 바란다. 그게 불편하면 이쯤에서 아예 방송을 접든지.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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