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사리분별을 따지기에 앞서 일단 정치적 목적으로 이슈가 던져지면서 일이 시작된다. 이해계층의 요구와 동조가 폭발하고, 이슈를 선점 당한 측에서는 더 파격적 방안으로 응수하고. 마침내 온갖 논객들이 뛰어들어 중구난방의 처방과 대책들을 쏟아낸다. 혼란스런 주장만 난무할 뿐, 좀처럼 구체적인 진전은 없다. 우리사회의 전형적인 논의과정이다.

'반값 등록금'도 정확히 이대로다. 한나라당이 대선 전에 슬쩍 들고나왔다 밀쳐둔 이 문제를 재보선 민심에 놀라 덜커덕 끄집어냈고, 아차 싶었던 민주당은 '무상 등록금'으로까지 내달렸다. 논쟁은 폭발했으나 책임 있는 누구도 정리하기는커녕 같이 변죽이나 울리며 혼란을 키웠다. 뒤늦게 대통령이 속도 조절을 주문하면서 분위기가 급속 냉각됐다. 이래선 기대에 부풀었던 저소득층 학생ㆍ학부모들만 마음에 상처를 입을 공산이 크다.

본질 왜곡하는 잘못된 이름짓기

남 탓하듯 했지만 이 비생산적 논의구조에서 언론의 책임은 누구 못지않게 크다. 표적을 단순화ㆍ집중화함으로써 핵심에 접근하기보다는, 일단 사방으로 확전하고 보는 게 언론의 습성이다. 이번엔 교수사회가 유탄을 맞아 별 하는 일 없이 돈만 챙겨가는 고액 등록금의 원흉이 됐다. 부분적으로 타당한 부분이 있지만 해결해야 할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번번이 현안을 꼬이게 하는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 당장의 정치사회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가장 자극적으로 이름 붙이는 작명법(作名法)이다. 예전 과실사건에 가까운 '효순ㆍ미선양 사망사건'이 '미군 여중생학살(살해)사건'으로 불리면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른 것도 한 예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광우병 쇠고기'로 명명되면서 정작 과학적 논쟁을 벗어난 격렬한 갈등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다. 정부가 광우병 걸린 고기를 들여와 먹인다는 데야 누군들 가만있겠는가.

잘못된 네이밍(namingㆍ이름 붙이기)은 사안의 본질을 왜곡함으로써 아예 해결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반값 등록금'은 지난 대선 전 한나라당 경선 때 MB캠프가 구성한 '등록금절반인하위원회'가 원조다. 생색을 내기 위해 원색적인 이름을 붙인 게 화근이었다. 당시 논의는 2조원 정도의 예산을 투입, 국가장학제도를 확대하는 것이 골자였다. 부수적으로 대학 기부금 세액공제와 학자금 대출이자 경감방안이 거론됐다. 반값 등록금이 아닌 장학금 확대방안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재정적으로나 사회통념상으로나, 무엇보다 교육적으로도 납득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반값 등록금'은 그 이름 자체에 학생과 학교의 어떤 조건도 고려치 않는 일률성과 획일성이 담긴다. 또 정치권에서 언급되는 순간, 태반이 국민세금으로 부담해야 하는 문제로 인식된다. 획일적 평등은 언뜻 그럴 듯해 보이지만 필연적으로 현실적 불평등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학생의 성적, 자질, 경제적 환경 등이 모두 무시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사회적 정의를 허무는 결과를 낳는다. 등록금 따위를 전혀 걱정할 필요 없는 부자들을 위해 근근이 일상을 꾸리는 이들의 세금이 쓰인다는 게 말이 되는가. 공부보다는 그저 졸업장이나 얻으려는 학생이나, 학교 꼴조차 제대로 못 갖춘 엉터리 대학에 낭비될 세금도 그렇다.

장학금 지급방식이 정의에 부합

'반값 등록금'이 아니라, 등록금 절반을 장학금으로 지급한다는 뜻의 '절반 장학금'정도로 바꾸면 전체적인 투입비용은 같아도 운용의 융통성과 합리성은 훨씬 커진다. 생활수준과 성적을 적절하게 반영해 전액장학금 지급에서 등록금 전액 부담까지 여러 단계로 지원대상을 세분화하고, 교육의 질과 효용을 따져 대학에도 같은 차등방식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게 세금을 내는 쪽이나 지원 받는 쪽 모두에게 설득력을 갖는 방법이다.

대학생보다 더 급하게 국가가 보듬어야 할 극빈, 소외계층이 숱하게 방치돼 있는 상황이다. 최소한의 정의에 부합하는 논의를 위해서라도 '반값 등록금' 따위의 잘못된 이름부터 당장 버리는 게 맞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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