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에서 혁명은 한 차례, 쿠데타는 두 번 있었다. 4ㆍ19혁명과 5ㆍ16 5ㆍ17쿠데타다. 그러나 처음부터 일관된 명칭은 아니었다. 4ㆍ19는 학생혁명이었으나 5ㆍ16 후 의거로 격하됐다가 김영삼 정부에서 혁명으로 회복됐다. 5ㆍ16은 거꾸로 군사혁명에서 쿠데타로 바뀌었다. 역시 YS 때 일이다. (1980년 신군부의 5ㆍ17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는 1997년 대법원이 내란으로 규정하면서 쿠데타가 됐다)

알다시피 혁명이나 쿠데타 모두 비합법 수단으로 지배체제를 뒤집는 행위이되, 본질적인 차이를 갖는다. 혁명은 촉발단계서부터 다수 민중의 동의를 얻어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반면, 쿠데타는 무력을 동원한 소수집단에 의해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치러진다는 점에서부터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혁명이나 쿠데타는 발생 및 진행형태에 따른 구분일 뿐, 결과나 추후 평가로 규정하는 가치개념이 아니다.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든 쿠데타

체제의 전복인지 지배자의 교체인지, 또는 성패에 따라 구별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분류법은 아니다. 5ㆍ16은 불과 250여명 장교들이 은밀하게 모의해 군사적 전격 기습으로 합법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논의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쿠데타다. 다시 말해 5ㆍ16 쿠데타는 실체어(實體語)이되 혁명은 수사(修辭)다.

이치가 분명한데도 새삼스럽게 5ㆍ16 명칭을 놓고 한 차례 광풍이 일었다. 보ㆍ혁 진영간에 오간 공방은 그러나 정확히 명칭논쟁은 아니었다. 핵심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였다. 50주년이라는 시점이 계기가 됐지만, 공방이 격하게 치달은 것은 당장 내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보수 대표주자로 부각된 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사회과학적 논쟁이 아닌, 결국 정치논쟁이었다.

이미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는 충분히 이뤄져 있다. 평가를 제약할 만한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족쇄에서 풀려난 지도 20년이 넘었다. 어느 쪽에 가중치를 두느냐는 개인적 선택만 남았다. 당장 먹고 사는 현실의 삶을 중시하는 이들은 박정희 시대를 역동적 발전의 시기로 기억할 것이고, 정치적ㆍ정신적 가치에 무게를 두는 이라면 야만의 암흑시기로 평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5ㆍ16 쿠데타의 명분 쪽을 좀 더 이해하는 편이다. 소문이 파다한 상태에서 모의가 반공개적으로 이뤄졌고, 일부 진보지식인마저 수긍하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면 당시 나라 꼴과 민심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장면 정부가 1년 밖에 안됐고, 갈수록 안정됐으리란 반론도 있다.

그러나 최근 매 정권에서도 보듯 1년은 고사하고 채 몇 달을 못 기다려 서로 마냥 흔들어대는 풍토에서 이런 반론은 우습다. 성숙한 민중역량으로 박정희 아니어도 그만한 국가발전이 가능했을 것이라느니, 다른 국가들과의 성장률비교 등을 통해 경제성장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시각도 여러 논리로 반박 가능하다. 그러나 말했듯 다 각자 관점의 문제이니 강요할 건 아니다.

역사는 정치적 활용물이 아니다

다만, 분명한 건 비록 박정희 시대를 긍정 평가한다 해도 박정희의 국가 운영방식은 그 시대적 여건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는 당연한 전제를 망각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사회가치가 미분화한 상태였고, 국가지도자에 대한 왕조시대적 정서가 남아 있었으며, 국제환경도 유연하고 우호적이었던 시대였다. 지금처럼 국민의식이 성장해 있고, 자유ㆍ인권이 보편가치로 받아들여지며, 냉혹한 무한경쟁의 국제환경에서 박정희 식 리더십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대화와 타협, 조율과 배려가 이 시대 지도자의 최고 덕목임은 노무현과 MB의 정치적 추락에서 거듭 입증된 사실이다.

5ㆍ16 명칭논쟁을 통해 박정희 향수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그래서 위험하고 시대착오적이다. 정치상황에 따라 열린 평가와 극단적 비난을 오가는 야당 정치인들의 행태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언제나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지, 필요에 따라 입맛대로 건드릴 정치적 활용물이 아니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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