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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29> 도예가 신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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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29> 도예가 신상호

입력
2009.06.23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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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가소성은 그의 화두이고, 흙의 가변성은 그의 가능성이다. 도예가 신상호(62)씨는 자신의 작품을 '구운 흙'이라 뭉뚱그린다. 전통 도자기에서 출발, 해외로부터 값진 선물로 호평받던 그의 도자기 예술은 이제 그릇에서 일반 회화의 경지를 추구하고 있다.

"흙의 본질을 탐색하고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가"라는 저간의 평가였지만, 신씨는 '구운 그림'(Fired Painting)으로 이번에 일반의 안이한 생각을 보기좋게 배반했다. 도예의 한계. 바로 저것이 항상 화두였다.

그는 한계를 초월하는 데 온 힘을 바쳐 왔다. 그는 이천에서 작업을 하다 1976년 경기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로 삶의 터전을 통째로 옮겼다. 이름하여 '부곡도방'.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문화행사의 하나로 이곳에서 열렸던 '현대 도예 워크숍'은 한국의 현대도예사를 쓰겠다는 그의 꿈을 배태시켰다. 그의 도방 안팎은 그 증거들로 가득하다.

신씨는 "언론과 '구운 그림'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히 하는 것은 처음"이라 했다. 홈페이지( http://clayarch.org/clay/clay01.vm)를 추천하기도 했다.

- 정원 곳곳에 들소 모양의 조형물이 배치돼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하다.

"2002년 '아프리카의 꿈' 전시 때 제작했던 작품들이다. 당시 한국적 샤머니즘을 아프리카 토속미와 결부시킨 작품이라 해서 언론의 주목을 제법 받았다. 나는 젊은이들보다 더 진취적으로 작업을 한다. 변화하지 않는 예술은 죽은 거다. 지금은 도예가 건축과 만나는 작업을 하고 있다."

- 전통 도예에서 창작 도예로,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현재 당신의 작업을 가리키는 'Fired Painting'이란 무엇인가? '구운 그림'이라고도 하는데?

"사회의 변화와 사람들의 기호를 고려, 내 작품을 건축미술에 연계시키는 거다. 흙 안료로 색을 낸 뒤, 5~6회 소성 작업을 한다. 건물이 옷을 갈아입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화려하면서도 영구불변의 색채가 실용성까지 가진다. 계속 실험 중이다."

- 언제부터 시험했나.

"2006년 김해미술관의 '클레이 아크'(Clay Arch) 전을 통해 선보였던 새 양식이다. 흙(clay)과 건축(architecture)의 상호관계적 협력을 의미하는 합성어이다. 당시 '미술관이 옷을 갈아입는다'는 컨셉트로 시도했던, 말하자면 건축 도자다.

흙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도자와 건축 분야의 상호 발전적 협력으로 실현시키자는 의도다. 도자는 건축이라는 계기를 통해 활용 가능성을 넓히고, 건축은 도자를 통해 예술적ㆍ재료적 다양성을 확보함으로써 서로 간의 이익을 꾀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아프리카 것 하면서 색채의 세계를 재발견했다."

- 아프리카전은 무채색이 위주였으나, 이번에는 눈부신 색채감이 인상적이다.

"구운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험한 것은 2005년 이후다. 한국적 오방색은 의식적으로 안 썼다. 그러다 작년에 개인적으로 영국을 여행하며 런던 소더비 옥션에서 우리 조각보 경매 소식을 접하고, 색채의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내 뿌리를 타인의 시선으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오는 10월말 기무사 자리에서 여는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 'Wrap 연작'은 그 연장이다. 대형 걸개그림으로 조각보 그림 4점이 나온다. 가장 큰 것이 7X12m인데, 기무사를 국립현대미술관이 감싼다는 개념이다. 50X50cm의 타일 168장도 설치할 계획이다."

- 말하자면 환경예술인가.

"거기까지는 아니다. 도예의 한계를 건축으로 돌파하자는 것이다. 건축은 '비(非)자유'스러워져 가고 있고, '클리셰'(진부한 표현)화해 간다."

- 현재 건축의 흐름에 대한 경고로도 들린다.

"인위적이면서 지엽적인 면에 매몰되지 말라는 메시지다. 김해 클레이 아크 미술관의 개막전이 '건축과 도예의 만남'이었는데, 당시 세미나에 참석한 세계적 전문가들에게 제안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American Ceramics'나 스위스의 'International Ceramic Artist' 등 세계적 권위지의 편집자들이 참석한 그 자리에서 나는 1970년대 이후 나타난 도예의 조형예술화 흐름을 구운 그림이라는 최신 유형으로 정립하겠다고 이야기했다."

- 구운 그림이 실제로 나타나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지난해 광화문 금호아시아나빌딩의 경기여고 쪽 외벽에 걸었던 게 국내 첫 작품이다. 4층 높이로 50X50cm의 구운 그림 작품을 1,050장 붙여 만든 것인데, 건물 분위기를 일신했다는 평을 들었다. 접착할 때 시멘트는 안 쓰고, 알루미늄으로 만든 격자형 틀에 끼운 뒤 일반 유리용 접착제로 고정시켰다.

그밖에 서초동 삼성전자빌딩 로비, 건국대의 50층짜리 건물인 실버빌딩에서도 나의 구운 그림을 볼 수 있다. 나는 필요를 존중하고 그 같은 취지로 실험ㆍ시도해 오고 있다. 이번에는 벽이 캔버스이고, 거기 맞게 고쳐서 다시 굽고 붙인다."

- 부곡도방에 있는 건물마다 숫자(예를 들면 757016, 781002 등)가 커다랗게 붙어 있는데, 어떤 심오한 의미라도.

"집마다 숫자를 붙여 각각의 고유성을 부여했다. 언어, 암호, 기호, 바코드인 셈이다. 기자처럼 '그게 뭡니까?'라는 질문을 유발하는 수학적 언어로 이해해 달라. 촘스키, 도킨스가 쓴 책에 보면 다 나오는 얘기다. 요즘 시대, 타인과 나의 필요가 작품의 정점으로 가면 소통할 수 있는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현재의 예술은 논리적ㆍ철학적 깊이가 없으면 작품이 될 수 없다."

- 색채가 선명해서 정말 건물이 천연색 옷을 입은 것 같다. 색칠은 어떤 물감으로 하나.

"물감이 아니다. 흙을 물감처럼 만든 기성 건축재료다. 지금껏 단순 건축재료로만 쓰였는데, 나는 그것을 (물감처럼) 물에 개기 때문에 색이 변하거나 겹쳐져 독특한 효과를 내는 것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못 내는 색깔이, 불에 구웠기 때문에 나온다. 천년 지나도 그대로인 색이다."

- 그림 옷을 입은 건축물이 더 생기나.

"올해는 건물 작업은 없다. 기무사 건물처럼 내가 발전시킨, '작가 행위'만 할 작정이다. 그렇게 건축에도, 예술에도 변화를 준다. 예술은 새로운 거다. 이걸 바탕으로 또 새로운 게 나올 것이다."

- 학교 일은 어떻게 됐나.

"홍익대에서 정년 5년 앞두고 지난해 명퇴했다. 미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했지만, 내 작업만 하고 싶다는 오랜 꿈이 이뤄진 셈이다."

- 어떤 확신이라도 있었나.

"2년 동안 구운 그림에 매진했다. 건축에 색을, 옷을 입히자는 새 개념의 폭발력은 대단할 것이다. 장담컨대 IT산업 못지않을 것이다. 빌딩 자체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기도 하니까. 흙을 재료로 하는 것이고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니, 영원히 (건물의 옷을) 바꿀 수 있다. 결코 고갈되는 법이 없다.

런던에도, 도쿄에도 짓겠다. 건물을 이걸로 감싸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새로운 건물에의 욕구는 무궁무진하다. 도쿄의 프라다 빌딩, 카르티에 빌딩, 헤르메스 빌딩이 '옷'을 입게 될 것이다."

- 왜 도예 그림인가.

"일반 회화에서도 아크릴, 유화, 과슈 등이 각각의 재료적 특성을 갖고 물감이 갖는 표현의 한계를 극복한다. 나는 세라믹 산업이 제공하는 영구적인 색을 더 깊이 추구하자는 거다. 빨강이라도 빛과 열을 통해 나온 빨강은 분명 다르다.

그림을 외벽에 걸 수 있다는 점, 주변 사물에 비해 영원히 고정불변하다는 점은 물론이고, 계산ㆍ예측치와 실제 결과 간의 어긋남도 큰 매력이다. 주위 사물들에 비해 탈색도, 변색도 없는 그림은 결국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숨을 쉬는 그림이라 할까."

- 해외 평단의 반응은.

"나는 외국의 반응에는 관심 없다. 내가 살아 있고, 작업하니 족한 것 아닌가."

- 후학들이 여기 저기서 많이 작업 중인데.

"5년 전부터 배우는 대학원생이 8명 있다. 나는 저들의 손을 빌리고, 저들은 내 일을 갖고 실험하는 거다."

● 제자가 바라본 스승 신상호

12년째 신상호씨의 직계 문하생으로, 아예 도방에서 기거 중인 제자 용환천(홍익대 도예과 대학원 졸업)씨는 스승을 "실험적 현대 도예의 선봉"이라고 했다. 그는 신씨의 '구운 그림' 작업으로 인해 "도예하는 사람들에게 그릴 수 있는 자유, 색깔의 자유가 생겼다. 즉 언어를 획득한 것"이라며 "IT산업보다 더 폭발력 있다는 것은 바로 그 뜻"이라고 말했다.

산업미술과의 차이는? "대량 생산ㆍ반복이 아니다. 각각의 작품이 다르다. 건축의 재료가 아니라, 독자적 작품이기 대문이다. 우리는 찍어내는 게 아니라, 그린다."

용씨는 구운 그림을 타일이라는 관점에 한정, 회화가 아니라 디자인 또는 공공미술로 묶어두려 하는 국내 미술계의 협량함을 문제로 지적했다. "대량생산과는 전혀 무관한 작업이다. 선생은 대량생산과 연관시키려 하지만, 산업적 타일에서 벗어난 작품으로서의 흙판(세라믹)이 된다면 건축물 등을 통해 감상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예술품 아닌가?"

그는 스승을 가리켜 "직설적이다. 강하다"고 했다. 신씨는 스스로를 "이 세련된 사회와 불화하며 내면의 갈증을 풀어갈, 모순의 인간"이라고 자평했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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