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8년 전이네요. 무더웠던 2000년 8월. 전년도에 입대한 남자 친구가 휴가를 나왔습니다. 남자라면 가야 하는 군대, 기왕이면 팔각모를 쓰겠다며 해병대에 지원한 ‘남친’은 백령도에서 근무하고 있었지요.

첫 휴가 뒤 몇 달 지나지도 않아서 고참병 셋과 함께 포상휴가를 나왔습니다. 남친 집은 서울이었고, 전 인천에 살 때였지요. 하필이면 휴가 나온 그날이 할아버지 생신이었습니다. 가족이 저녁 외식을 하기로 했는데 남친 얘기를 하니까 부모님께서 데려오라 하셨어요.

여객터미널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까맣게 그을린 남친과 더 새까만 고참 셋. 남친의 고참들이어서 잘 봐달라는 뇌물로 점심식사라도 대접하겠다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그럼 신세 좀 질까요?”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번화가에 가 당시 학생인 제 용돈으론 부담 큰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칼질’을 했습니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고참 한명이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영화는 제가 쏠 테니까 함께 가시죠.” “어머, 죄송한데… 그냥 담에 보여주시면 안될까요?” 남친과 둘이 데이트하고 싶어서 거절 멘트를 날렸는데 눈치 없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그 고참, “아닙니다. 죄송은요. 그런 생각 말고 함께 가시죠”. 그리곤 남친에게 못을 박더군요. “야, 최 일병 가자.”울며 겨자 먹기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영화를 보고 나오니까 어느덧 어둑어둑해졌습니다.

남친과 고참들이 극장 앞에서 담배를 꺼내 무는데 엄마에게서 “어딘데 아직 안 오니?”하고 전화가 왔고 그 순간 “아얏!”하는 비명소리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세상에 그런 우연이 있을까요? 제게 전화하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지팡이 든 할아버지께서 서계시는 겁니다. 외식하러 나오셨다가 저희와 맞닥뜨린 거지요.

“이 놈들이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물어? 길 한복판에서! 니들 몇 기야?”할아버지의 지팡이는 남친과 고참들의 머리통을 차례로 가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요, 귀신도 얼차려준다는 해병대 4기십니다.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전하셨다니까요. 그때 일흔이 넘으셨지만 정말 정정하실 때였지요. 이제야 제가 왜 군대, 특히 해병대 얘기를 잘 아는지 아시겠죠?

제 남친은 해병대 864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 기수 차이도 엄청나다고 들었는데 하늘같은 대선배를 만났으니…. 할아버지께선 그 사람 많은 길 한복판에서 “박아! 일어서…”를 외치셨고, 남친과 고참들은 할아버지의 구령대로 길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고…. 잠시 후 할아버지, “이것들이 해병대 이름에 먹칠을 하려고 작정했나? 젤 고참 누구야?”한명이 나섰습니다. “병장, 박○○!”“휴가보고 실시!!”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그 고참은 곧바로 외쳤습니다. “필승! 신고합니다. 병장 박○○ 외 3명은 2000년 8월22일부로 3박4일간의 포상휴가를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필승!”

할아버지의 성격을 아시는 엄마 아빠는 그냥 웃으시는데 전 정말 창피했습니다. 제 눈치만 살피는 남친을 보니 정말 불쌍하더군요. 그리고 잠시 뒤 우리 가족과 남친, 그리고 고참들은 할아버지에게 이끌려 허름한 실내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사건은 거기에서 더 커졌습니다.

초저녁이라 손님이 얼마 없기에 망정이었지요. 할아버지께선 앉자마자 소주부터 시키셨습니다. 그리곤 신고 계신 새하얀 고무신을 벗더니 휴가보고를 한 고참에게 건네시고는 거기다 소주 한 병을 통째로 붓는 게 아니겠습니까. 신기하게도 어쩜 고무신에 소주 한 병이 더도 덜도 아니게 딱 들어 가더라구요.

엄마가 뭔가 말하려다 “어험”하는 할아버지의 기침에 입을 닫으셨지만, 이유를 아는 전 속이 울렁거리는걸 겨우 참았어요. 우리 할아버지요, 그 해 여름 무좀으로 고생하시고 계셨거든요. 그래서 통풍 잘 된다고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습니다. 그 고무신에 술을 부어 마시라고 하시니. 아무튼 아무것도 모르는 그 고참 정말 잘 마시대요.

그리고 다음 고참…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제 남친이 든 고무신에도 술을 채우려 하자 제가 다급히 나섰습니다. “할아버지, 이 사람이 제 남자친군데요, 술 정말 못 마셔요. 한번만 봐주세요 할아버지, 네?”갖은 애교를 다 떨었건만 평소에 절 그렇게 예뻐하시던 할아버지, “어허~ 남자가”. 역시나 아무것도 모르는 남친, “감사히 마시겠습니다”라는 말까지 외치며 술을 받아 마셨습니다. 술 한잔 안마신 제가 오히려 토할 것 같아 죽을 뻔 했지요.

그날 그렇게 헤어지고 저, 3박4일 동안 남친 얼굴 한번도 못 봤습니다. 술 못 마시는 남친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할아버지의 무좀균이 뱃속으로 들어가서 그랬던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3박4일 내내 화장실에서 변기 끌어안고 살았다고 하대요.

그나마 복귀하는 날 바래다 준다고 나갔는데 고참들 오기 전에 여객터미널 뒷편에서 제게 뽀뽀하려던 남친을 뒤로 밀어버린 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미안했습니다. 근데 정말, 도저히 뽀뽀도 못 하겠더라구요. ㅠ.ㅠ” 나머지 고참 세 명도 봤는데 모두 얼굴이 휴가 나왔을 때보다 핼쑥해졌더라구요. ;

그날 이후로 남친이 휴가 나올 때 마중 나가면 아무도 없이 혼자만 있었습니다. 정기휴가라도 몇이 함께 나온다고 들었는데, 부대에서 무슨 소문이 어떻게 난 건지 거짓말처럼 항상 남친 혼자만 기다리고 있더라구요.

지금은 저 먼 하늘나라에 계시는 우리 할아버지. 지금도 그곳에서 후배 해병대원들 얼차려주시는 건 아닌지, 고무신에 술 따라주시는 건 아닌지… …. 할아버지, 정말 보고싶어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신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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