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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6> 도정일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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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6> 도정일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입력
2007.02.08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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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여, 닭을 잡아 먹지 마라 / 그 닭은 그대의 할머니일지도 모르므로.”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에서의 메타포는 미상불 기괴하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더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시인의 말을 빌면 할머니를 소스에 찍어 먹는 형국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오늘날 그 같은 행위는 광범히 유포돼 천연덕스런 일상이 되고 말았다.

문학평론가 도정일(66)씨는 오비디우스의 시구를 끄집어 내고,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이 시인들로부터 아름다움에 대한 마지막 인내력마저 소진시켰음에 틀림없다고 단언한다. 그 같은 확신의 밑바닥에는 이런 명제 하나가 불길하게 흐물대고 있을 거라고 그는 예시한다. ‘자동 판매기가 / 고무 호스로, 밑을 대주는 종이컵들을 윤간하고 있다. / 창녀들은 포주의 뱃속에서 / 밥을 빌어 먹는다.’(최승호의 <무인칭 시대> 중)

운문의 형식을 빌어 그려진 저 지옥도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는 말한다. “1970년대 이후의 한국사는 과거 어느 시기 것과도 다른 욕망 생성의 사회적 환경, 정확히 말하면 ‘천민 자본주의’의 환경 속에서 씌어져 왔다. 21세기, 저 환경은 더욱 정교해져 ‘탐욕’이라는 형태의 지배적 욕망을 사회적으로 생산하고 있다”고.

그가 여기 저기 실린 평론들을 묶어 처음으로 낸 책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읽어 낸 생명들의 표정이다. 시적 분석의 형태를 취하지만, 곳곳에서 문명 비평의 체취를 짙게 풍긴다. 전례를 찾기 힘든 글쓰기에, 사람들은 ‘경쾌한 듯 한데,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서 배제당한 자연은 역으로 인간을 배제한다. 시인은 눈 내리는 숲으로 가지 못하고 아이들은, 비를 겁내고, 농사꾼은 땅을 믿지 못한다. 비슷한 이유로, 풀잎은 시인을 배제한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비 맞으면 안 돼”라는 어머니의 당부가 깊이 박혀 있다’ 또는 ‘농약 끈적한 풀밭에 앉아 풀잎의 숨소리를 들어야 하는 왜곡과 변태를, 그 비참함을, 그가 무슨 수로 견딜 수 있으랴. 비는 시인을 배제한다’는 진술을 보라.

푸른 강 대신에 그에게는 ‘똥물’이 있고, ‘똥통’이 된 지구가 있다. 시인들마냥, 그 역시 강으로부터 배제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강과 함께 사는 듯이 생각하는 환각의 능력이 필요하고 감성 분열의, 평론가적 능력이 필요하다.

경쾌한 듯 어려운 詩분석 속의 문명 비평

“눈·비 맞기 두려운 시대 문학도 곤경에 자연 착취·파괴 추방에 문학이 앞장서야”

‘인문학의 갈 길’ 10년전의 메시지 오롯이

책의 말마 따나 산성 눈 내리는 지금, 이 세계의 어느 숲이 아름다울 것이며 누가 그 숲에 취해 발길을 멈추는가? 그 같은 현실 앞에 낭패감을 느끼고, 처리 곤란한 딸꾹질에 내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그는 고백한다. “마르쿠제가 강조했던 것처럼 자연이 노예화할 경우,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 자신도 노예화의 운명을 피하지 못하죠. 자연에 발생한 재난은 곧바로 문학의 재난이며, 자연의 수난은 곧장 문학 자체의 수난이에요.”.

문명 비평 같기도 하고, 시민 운동을 위한 굳건한 지지대 같기도 하고, 개성 넘치는 사유에 빚지고 있는 수상록 같기도 한 이 책은 이 강퍅한 시대에 인문학은 어떻게 존재해야 할 지를 예시한다. 창작과비평 등 잡지ㆍ강연 등에 산발적으로 소개된 글들을 어느 눈밝은 편집자가 모아 두었다, <녹색평론>에 썼던 제목을 내세워 단행본으로 묶은 이 책은 1994년 1쇄를 찍은 이래 현재 10쇄 까지 찍었다는 기록에 빛난다.

그 와중에 1만부 팔리고 절판된 기록도 갖고 있는, 별난 문학평론집이다. “게으른 나로서는 수정ㆍ보완까지 했죠. 10년이 지났는데도 갖고 와, 사인을 부탁하는 독자에, 저도 놀랄 정도예요.” 아예 재판을 내자는 제의도 심심찮게 듣고 있다.

책은 한국 사회가 아직 그 광풍을 체감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눈을 치켜 뜨고 있다. 그것은 인문학자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믿는다. “동유럽 붕괴, 마르크시즘 퇴조 등에 대한 대안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구조주의와 해체론 쪽으로 갔어요. 책 속에 일관된 반포스트모더니즘론은 한 시대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바람의 결과였죠.”

비판의 칼날은 보건 사회ㆍ청결 사회에 대한 집착, 웰빙에 대한 광적 증후에 예리하게 번득인다. 원로 인문학자의 의무감이기도 했다. “삶의 부조리, 유한성 앞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곧 인문학이니까요. 행복 이데올로기에 미친 시대에 대한 반동일지도 모릅니다.”

책은 위기에 처한 우리 시대 인문학이 택할 수 있는 방편도 제시했다. 문학인들끼리 통하는 언어만이 아닌, 문학과 대중의 괴리를 좁히고 문학이 대중의 삶에 어떤 영향 미치는가에 대한 실험이라고 서??밝힌 대로다. “문학과 삶 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환기시키자는 나의 비평적 모토가 발현된 거죠. 대학에서의 난삽한 비평 논의는 대중에게는 부담스럽고 불필요하니까요.” 그는 한국 문학 평론이 그 부분에서 돌파구를 열지 않으면, 문학 평론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고 힘 준다.

평론의 형식과 문체에 대한 실험이기도 했다. “에세이나 문학 저널리즘 같은 문체로, 대중의 삶에 접착된 형식말예요. 친근한 용어를 구사, 이론성ㆍ난삽성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인문학적 글쓰기.” 이런 종류의 평론은 처음 접했다며 일반인들은 반겼다.

대학 비평, 문학 이론 가르치며 한국 문학 현장 비평은 삼가왔던 그가 <문예중앙> 주간 정준수의 ‘꼬드김’에 몇 번 연재했던 계간평이 거둔 결과를 보면 자신도 좀 놀랍다. “이미 당시 문학 평론과 대중 간의 괴리는 심화돼 가고 있었죠. 지금은 서로 백리 밖이지만.”

이 반자연적 시대, 그의 책이 노둣돌 삼는 ‘숲’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생태 환경이에요. 좁게는 자연, 넓게는 자연과의 관계죠. 지금 한국은 볼거리 문화로 사람들을 마취시키려는 서커스 정책으로 통합돼 있잖아요?” 364쪽에 달하는 책은 눈ㆍ비 오면 오히려 두려워 하는 이 시대, 즉 자연이 망가진 때 문학이 당해야 하는 곤경을 증거한다.

삶의 모태인 자연을 착취ㆍ파괴하는 현상을 왜 추방해야 하는지, 문학은 철저히, 뼈저리게 느껴야 함이 동시대 우리 문인들의 육필로 증거돼 있다. 사회 혁명, 생산 양식, 소비 양식에 왜 일대 전환이 이뤄져야 하는지도. “생태란 게 어떻게 문학 속으로 용해될 수 있나를 보여주자는 거 였죠.”

그러나 어느 누가 냉장고를, 자동차를 포기할 것인가? “예술 작품이나 교육 같은 일상의 삶 속에서 풀어갈 수 있어야죠.” 그는 일상, 즉 현실에 아직도 문학이 할 일은 남아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대중 문화에 쫓겨, 문학 자체가 변두리에 내몰린 때예요. 문학과 예술이 인간의 삶에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인식부터 확산돼야 하는 시기죠.” 그는 이 책이 예술ㆍ문학의 사회적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기를, 나아가 평론가들이 문학과 소비자들 간의 연결 고리를 재정립해 주기를 소망한다.

책 속에 드러난 바, 그의 현실 인식 지형도를 고려한다면 상황은 화급하다 ‘지금의 문학은 오락의 한 형태다. 대중이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오락물의 형태로 이동해 가고 있다. 문학과 오락의 화간(和姦) 시대다.’ 그는 “문학이 이제 아예 말초적ㆍ외피적ㆍ감각적 엔터테인먼트로 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품어 온 문학의 속성 혹은 운명론이 있다.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반(反)행복론이라는 것이다. “독자의 엔터테인먼트 수준을 높이게 하고, 다양하면서도 근원적인 딜레마 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옮기려 하죠. 삶이 말초적 오락의 수준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예술이 문학이니까요.”

생태 파괴와 간통한 온난화가 성큼성큼 한반도를 잡아 먹으려 오는 때, 그의 말은 이 책의 속편을 암시한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지만 그들은 하루하루 눈앞의 삶에 매여 있다. 그들에게는 개발 정책만큼 매력적인 것이란 없다. 한국에서, 환경청이란 영원히 찬밥 신세 아닌가?”

■ ‘책 읽는 사회…’ 5년 활동, 농어촌 57개 도서관 재건

명함이 말하듯, 또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는 글보다 행동으로 더 이름 높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재 그의 명함이 알려주는 바, 그는 <책 읽는 사회 문화 재단>의 이사장이다. 시인이 숲으로 가지 못하는 시대, 그의 책은 숲속에 안주할 수 없었다.

그가 책의 숲에서 사람의 숲으로 온 것은 1999년 문화연대 출범에 맞춰 시민운동에 적극 관여하기 시작하면서다. 그는 뛰면서 생각하고 발로 썼다. 잡지사, 언론사, 대학 교수(작년 2월 퇴임) 등을 두루 거쳐 지금은 민간 사회 운동의 축이 된 그가 한갓지게 자연을 완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평론이라도 그가 쓴 글은 여느 책상물림의 글과 달랐다. 신문의 칼럼을 써도, 그의 논조는 ‘정치적 변화가 있을 때마다 죽통에 쉬파리 엉기듯 달려들어 세상의 소음을 늘리는 데 공헌하는 3류 학자’(<시인은…> 389쪽)의 글이 아니었다. YS 정권 때는 정부의 문화 정책 자문에, DJ 때는 대통령정책자문위원회에 적극 응했던 그의 관심은 현실 속의 문화 운동 또는 정책이었다.

지난해 2월 경희대 퇴임 직후, 지인들은 “책 없는 퇴임 없다”며 “책 내고 강연회도 갖자”고 성화였다. 그러나 팔 걷어 부치고 뛰어든 <책읽는…> 사업에 열중하느라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2002년 받은 암 수술은 그를 더욱 강하게 했다.

“지난 5년 동안은 ‘책 읽는 사회…’ 사업에 송두리째 바쳤지만, 그 동안 잃어 버린 시간들을 앞으로 복구해 낼 것”이라 다짐한다. 대기업의 기부를 받아, 지난해 9월 이후 농어촌 낙도 지역의 도서관 57개를 도시 도서관 뺨치는 수준으로 리모델링한 ‘작은 도서관 사업’은 한국 땅에서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공공 지식’의 중요성을 새삼 알려낸 쾌거로 기억된다.

그의 컴퓨터에 간직돼 있는 20여권 분량의 원고는 더러 제목만으로도 족히 호기심을 자극한다. <쓰잘 데 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라니. 상생, 평화, 선린, 공존 등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체온에 대해 이야기해 줄 책이다. 이성복 시인의 어투를 흉내낸다면, 일에 밀려 하드 디스크에서 뒹구는 원고들은 언제 잠을 깰까?

▲ 약력

1941년 경남 고성 출생

1961년 경희대 입학

1965년 시사영어 편집장

1972년 동양통신 사장

1983년 경희대 영문과 교수

2003년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사장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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