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고등학교 지도선생은 흥남공대를 가라고 했다. 기술자를 키우는 대학이었다. 학자가 되려면 김일성대를 가야 하는데 가톨릭 집안이라고 보내주질 않았다. 대학을 가지 않았다. 6ㆍ25가 터지고 가족은 월남을 했다. 부산으로 피난 와서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맏이인 나는 석달 동안 부산항에서 부두노동자를 하다가 미군 부대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하다가 사무직이 되었다. 그제사 대학공부를 다시 시작할 여유가 생겼다.

부산 대신동의 천막 교실에서 강의를 듣고, 범일동 대선 양조장 실험실에서 일반화학 실험을 하며 대학 생활을 할 때도 나는 세계적인 화학자가 되겠다는 앞날을 목표로 최선을 다했다.

서울로 대학이 수복해서 동숭동의 아름다운 교사에서 그런대로 낭만을 즐기며 공부하던 나였다. 화학 실험실에서, 그 뜨거운 여름날에도, 온 몸이 얼어 들어오는 한 겨울에도 방학도 없이 아침부터 밤중까지 그 안에서 살다시피 시험관과 씨름하면서도 늘 기쁨을 안고 지내던 나였다. 1954년 가을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교정의 마로니에와 플라타너스 잎새가 썰렁한 바람에 날려 뒹굴고 있었던 어느 날이다. 한국전쟁의 처절한 역사의 아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공부를 하고 싶어도 책을 구할 수 없고, 앞선 실험을 하려면 실험 시설과 시약이 없어 어쩌지도 못하는 현실을 온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교수님들과 선배들과 동료들이 하나씩 둘씩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화학이라는 학문에 내 인생을 거는, 희망찬 앞날을 포기하는 것이다. 오랜 고민과 마음의 아픔을 견디며 내린 결론이다.

과학사의 길로 나아가자. 내 인생 행로의 대 전환이었다. 어려서부터 화학 다음으로 좋아했던 인류의 역사가 나를 사로잡은 것이다. 그 역사학에 과학이 접목된 과학의 역사에 나는 어느새 빠져들고 있었다. 이제 실험실은 썰렁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과학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학문으로 자리 잡지도 못한 분야였다. 그리고 조금 더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 학문으로는 “밥을 먹을 수가 없는”, 오라는 데도 갈 데도 없는 그런 불모지였다. 그래도 과학사가 화학 하는 것 보다는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그 별들이 먼 것은 몇 백 광년 떨어진 우주의 어느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주에 끝이 있을까. 끝이 있다면 그 저쪽엔 무엇이 있을까. 또 끝이 없다면 무한한 물질세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인류는 언제 어디서 왔을까를 생각했다. 그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어쨌거나 나는 과학사의 길에 들어섰다. 평생해도 다 못할 새로운 공부를 하려는 것이었다. 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가. 그런 공부를 해서 내게 딸린 식구를 편안하게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인지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서울대 화학과를 나왔다는 간판 덕분에 고등학교 교사 자리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가지고 학자의 길에 들어서서 과학사 연구에 전념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낮에는 성실한 화학 교사로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밤에는 과학의 역사를 공부하는 수도자와도 같은 생활이 몇 년인가 계속되었다.

1960년대 초, 과학사의 연구에 매달렸던 나는 또 다른 문제에 부딪쳤다. 그 때까지 내가 파고 들었던 과학의 역사는 서양에서 전개됐던 지식이 중심이었다. 그 당연한 일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동양과 서양이 있다. 중국과 인도와 이슬람 문명에는 과학의 역사가 없는가. 있었다. 그렇다면 거기서 전개된 과학문명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가. 우리민족의 과학과 기술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그 한 자락을 들치고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한마디로 나는 동아시아의 과학문명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중국인은 그 오랜 역사를 통해서 위대한 과학 문명을 쌓아 올렸고, 9세기에서 14세기 이른바 서양의 중세는 어두운 세계였지만, 이슬람 과학 문명은 최고의 지적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 인도도 그랬다. 아라비아 숫자라고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계산 기호는 인도 사람들이 만든 숫자다.

우리 전통과학에 대한 인식은, 일제 식민지시대인 1930년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심어주기 위해서 하나같이 들어 올린, 첨성대 금속활자 측우기 고려청자 거북선 등에서 얻은 상식이 전부였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글은 감동적인 것 중의 하나였다.

“우리나라의 고려청자는 천하에 유명한 것이고, 이 충무공의 거북선도 철갑선 가운데는 천하에서 가장 먼저 만든 것이다. 교서관(校書館)의 금속활자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낸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이 깊이 연구하고 또 연구하여 편리한 방법을 경영하였더라면, 이 시대에 이르러 천만 가지 사물에 관한 세계 만국의 명예가 우리나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후배들이 앞 사람들의 옛 제도를 윤색치 못하였다.”

그리고 홍이섭의 ‘조선과학사’(1944년 일어판, 1946년 한글판)는 내 학문의 길의 나침반을 우리나라로 잡아주었다. 젊은 애국심과 민족적 자각과 자존심을 심어주고, 뜨거운 정열을 내 가슴에서 불타게 했다. 우리 전통과학의 과학적 창조성을, 과학사로서 학문적으로 논하는 글을 쓰자.

1960년대 초에 나는 논문을 세 편 썼다. 그 중 하나는 미국 예일대 과학사학과 주임교수였던 프라이스의 요청으로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혼천시계(渾天時計)를 조사 고증하는 내용이었다. 프라이스는 중국 과학사의 세계적 대가인 조세프 니덤(1900~1995)과 공동연구 프로젝트의 하나로 조선시대 천문시계를 연구 고증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의 과학사학자를 통해 의뢰를 받은 나는 몇 달 동안, 그야말로 침식을 잊은 노력 끝에 혼천시계를 연구했다. 1669년에 조선왕조 관상감의 천문학 교수 송이영(宋以潁 )이 제작해 낸 이 시계는 세계에서 유일한 천문시계였다. 조선시대의 정밀기계 기술이 혼천시계에 압축되어 있다. 나는 도저히 그 훌륭한 우리 자료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이 논문은 나중에 니덤이 존 메이저 등과 공저로 ‘조선왕조 서운관의 역사’(영어제목 ‘The Hall of Heavenly Records’)에 혼천시계가 한 챕터로 크게 소개되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논문을 학술지에 실어주겠다는 데가 없었다. 결국 일본 과학사학회지 ‘과학사 연구(科學史硏究)’에 냈다.

혼천시계 연구를 계기로 한국과학기술의 역사를 연구하자, 이것이 내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특히 세종시대의 과학과 기술은 너무도 엄청난 창조적 업적이었다. 세계 과학기술의 역사를 통틀어봐도 15세기의 가장 뛰어난 지적(知的) 성과는 조선에서 나왔다. 15세기는 세종의 시대다. 그 사실을 나는 1968년에 홍콩에서 열린 동아시아 과학사 전문가 회의에서 발표했다. 세계의 동아시아 과학사 학자들이 처음 듣는 소리지만, 세종시대의 뛰어난 업적에 공감해줬다. 공부(학문 연구)가 이렇게 재미있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우리 전통과학 기술의 창조성을 학문적으로 정리해보자. 그것을 새롭게 조명하고 제대로 평가하자. 일제가 교묘하게 심어놓은 식민사관의 찌꺼기들을 떨어내고 우리 전통과학을 새롭게 이해하게 하자. 그 작업을 계속한 지 45년이 흘렀다. 이제 내 인생의 해넘이가 시작되고 있다. 그 세월의 길목에서 내게는 기쁜 일이 많았다. 그 중의 하나만 써보자. 1983년에 일본에서 출판된 ‘과학사 기술사 사전’(이또오 야마다 편) 연표에는 기원전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세계과학기술의 역사적 업적들이 정리되어 있다. 연표에는 15세기 전반기(1400-1450년)까지 주요업적으로,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29건, 중국 5건, 일본 0건이며, 동아시아 이외의 세계 전 지역이 28건으로 정리되어 있다. 세종시대 과학기술의 업적이 15세기에 이루어진 다른 모든 나라의 성과를 능가한다는 사실이 나만의 주장이 아니라 전세계의 학계가 인정하는 객관적인 사실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 역사에 이렇게 자랑스러운 시대가 있었다는 기념비적인 사실에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하겠다.

■ 전상운 전 총장

전상운 전 성신여대 총장은 한국 전통 과학기술의 우수함을 밝혀내고 세계에 알린 한국 과학사학의 선구자이다. 그가 조선시대 과학기술의 탁월함을 저술한 책 '한국과학기술사'(1966년 초판, 1976년 개정판)는 74년에 미국 MIT대학 출판부에서 번역 출간되어 전세계에 한국 과학기술의 우수함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업적으로 그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동양과학사학회인 국제동아시아과학사회의의 4명 뿐인 명예회원이며 니덤연구소 유지재단의 국제이사며 중국 자연과학사연구소 '자연과학사연구'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1928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수료했으며 일본 교또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충주, 제천, 성신여고 교사를 거쳐 성신여대 교수를 지냈으며(65~85) 성신여대 총장을 역임했다.(85~89) 일 교토대학 객원교수, 영 켐브리지 니덤연구소 방문교수 등을 지냈다.

김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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