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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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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15

입력
1990.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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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유학서 돌아온 후 나도 숙청시련/“김숭배 비난등 자아비판 하라”/2달간 매일 「사상검토」 시달려/극한적 심리고문에 “죽여달라”사정도/당서 추방 당장 끼니걱정 처지로 전락북한에서 숙청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56년에서 58년까지 3년간이었다.

56년 8월 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연안파의 정면도전을 받았던 김일성은 이 사건을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라는 반당·반혁명 음모로 몰아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개시했다. 이때는 국제환경도 김일성이 마음껏 숙청을 시도할 수 있도록 변해있었다.

스탈린 격하운동의 여파로 56년 10월 헝가리에서 반소 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무력진압한 흐루시초프는 『공산주의 형제국들의 내정문제는 앞으로 간섭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10월선언」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소련과 중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된 김일성은 김두봉·최창익 등 연안파를 모조리 제거하고 소련파도 대거 숙청했다.

나는 다행히 이 시기에 소련으로 유학을 떠나 숙청바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이는 숙청시기를 다소 늦춘 것에 불과했다.

6·25전쟁을 통해 현대적 군사전략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김일성은 소련 정부에 요청,인민군 장성들을 소련군사아카데미에 유학을 보내기로 했다.

○소 추천으로 유학길

1차 대상자로 작전국장인 나 유성철과 군단장 김창봉·사단장 오진우(현 북한인민무력부장)·포병사령부 참모장 정학준 등 4명이 선정됐다.

처음에 나는 대상자로 꼽히지 않았으나 소련 군사 고문단의 적극 추천으로 막판에 끼게 됐다.

이렇게 해서 나는 56년 중반부터 58년 9월까지 2년여동안 소련 군사아카데미에서 한가로운 유학시절을 보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니 나를 맞아준 것은 「사상검토」라는 혹독한 시련이었다.

귀국날 평양 공항에 내리자 함께 온 김창봉·정학준은 영접하는 사람과 승용차가 나와 있었으나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련 생활중 나는 북한의 숙청선풍에 대해 어느정도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무언가 잘못 됐구나』하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내 예감은 적중했다.

내가 작전국으로 출근한지 3일째가 되던날 민족보위성에서 『일과가 끝난 뒤 사상검토위원회가 열리니 참석하라』는 통고를 받았다.

나는 일상적인 회의로 생각하고 참석했으나 회의가 시작되자 위원장은 나를 지목하면서 『4가지 과오를 범했으니 자아비판을 하라』고 다그쳤다.

졸지에 자아비판을 강요당한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일을 잘했다고 할때는 언제고 공부를 마치고 막 돌아온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러느냐』며 대들었다.

그러자 위원장은 『아직도 작전국장인줄 아느냐』고 언성을 높이면서 나를 죄인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세운 나의 4가지 죄과는 첫째 김일성에 대한 인민의 충성심을 개인숭배라고 비난했고 둘째 6·25전쟁을 김일성이 시작한듯이 말했으며 셋째 사업을 개인주의적으로 했고 넷째 소련을 위한 정탐활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내가 이같은 죄목을 뒤집어 쓰게된 연유를 알게 됐다.

소련 유학을 떠나기전 어느날 나는 내사무실로 놀러온 포병사령관 김봉률·포병사 참모장 정학준과 이런 저런 세상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다.

○두가지 혐의 사실무근

그러다 화제가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한 것에 미치자 나는 『우리나라에도 개인숭배가 있지 않느냐』고 조심스레 속마음을 드러냈었는데 누군가가 이 사실을 고해바친 모양이었다.

6·25전쟁 문제 역시 언젠가 김봉률·정학준과 만나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모색하는게 바람직했다』고 언급한 것이 화근이 됐다.

그러나 나머지 두가지 혐의는 전혀 사실무근이었다. 사업을 가족주의적으로 했다는 말은 업무를 수행하면서 파벌을 조성했다는 의미인데 그런일은 없었다.

소련을 위한 정탐활동 문제는 아마도 내가 소련군 고문관들과 가깝게 지냈고 그들의 추천으로 소련 유학을 갔던 일 등이 김일성의 비위를 거슬려서 생겨난 모략 같았다.

때문에 나는 혐의사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첫째로 개인숭배 비난 부분은 내가 김일성과 항일 유격대에서 함께 활동한 관계를 들어 부인했다. 또 가족주의 문제는 작전국은 그 중요성 때문에 유능한 인물을 발탁해 쓰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며 내가 뽑은 인물중 소련 출신들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정탐활동 주장은 당시 소련군 고문관이 주요 부서마다 파견돼 있는데 내가 굳이 정탐활동을 해야할 필요성이 있겠느냐는 반대논리로 맞섰다.

반면 6·25에 관한 발언은 솔직히 시인하고 자아비판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날부터 2개월간 피를 말리는 사상검토에 매일 시달려야 했다.

사상검토 회의는 보통 저녁 7시 정도에 시작돼 자정이나 새벽 1시께까지 계속됐다. 나는 사상검토가 시작되면서 작전국장 직책을 박탈당하고 낮에는 감시원이 붙은 빈방에서 반성문 등을 쓰고 밤에는 사상검토를 받는 생활을 했다.

사상검토는 개인의 인간성을 철저히 파괴하려는 심리적 고문행위와 다름없다. 사상검토 위원들은 내가 그들이 만족해 하는 자아비판을 할 때까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괴롭혔다. 그들은 내가 한마디 할 때마다 물고 늘어져 독설을 퍼부었으며 욕설과 고함을 지르는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나는 며칠만에 절망적 심정으로 그들의 비난을 모두 수긍했으나 그들은 매일 밤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며 나를 괴롭혔다.

○인간성 파괴 다름없어

이런 심리적 고문을 견디다 못한 나는 작전국에서 내 부하로 있었던 사상검토 위원에게 『이렇게 사람 피를 말리지 말고 차라리 빨리 죽여달라』고 사정할 만큼 극한상태에 빠졌었다.

사실 당시에는 사상검토를 견디다 못해 자살하거나 미쳐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사상검토가 끝날 무렵 그들은 나에게 중장계급장을 떼라고 요구했다. 나는 『이 계급장만은 민족보위상이 달아준 것이니 보위상의 명령 없이는 뗄 수 없다』고 버텼으나 그들은 나를 비웃으며 강제로 계급장을 뜯어내고 말았다.

사상검토가 끝나자 나는 북한에서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동시에 잃어 버렸다.

인민군은 물론 당에서도 쫓겨났으며 당장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가 돼 버렸다. 사상검토를 받았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친척들의 발길이 끊기고 옛 친구들도 외면해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간신히 일부 이웃에서 식량을 조금씩 얻어다가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다.

○한겨울에 집도 뺏겨

그러나 기온이 영하 22도까지 떨어진 59년 1월의 어느날 우리는 살고 있던 집에서 조차 강제로 내쫓겼다. 우리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옛날에 마굿간으로 사용하다 버려진 근처 단칸집을 찾아내 그리로 들어갔다. 이 집은 창문이 모두 망가지고 방바닥은 얼음장이었지만 길거리에서 얼어죽을 수는 없어 무조건 옮겨 갔다.

더욱이 이때 국민학교 5학년이던 큰딸 소야는 홍역을 앓아 누워 있었다.

나는 김일성의 잔인성에 치를 떨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자 이 건물을 관리하는 군인이 찾아와 이곳에서도 나가라고 요구했다.

나의 처 김용옥은 너무 악에 바쳐 그 군인에게 『당신들이 코 흘릴 때 우리는 목숨을 바쳐 조국을 보위한 사람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울부짖었다.

허나 그 군인은 상부의 명령이라 어쩔수 없다며 막무가내였다.

나는 가족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당시 중앙당 검열위원장으로 있던 김창덕을 찾아갔다. 김창덕은 연안파 출신이었으나 무능력하다는 낙인이 찍혀 한직을 맴돌았던 사람인데 내가 추천하여 5사단장으로 기용된 뒤 검열위원장으로 승진했다.

이런 신세를 진 탓인지 김창덕은 내 하소연을 듣고는 계속 그 집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김창덕은 나에게 『계속 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며칠 뒤 나는 내각간부국으로부터 함경남도 도당 간부로 발령한다는 파견장과 밀봉된 편지하나를 받았다.

나는 뛸듯이 기뻐하며 파견장과 편지를 갖고 그날로 함흥으로 달려갔다.<공동집필 최평길교수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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