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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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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3

입력
1990.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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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휘하병사 많아 구심역할/동지의식 「빨치산」만 신임/소 출신은 후에 모두 숙청/최용진 변절 아버지 총살집행 일화/북한 6ㆍ25 역사기록서 내존재 없애1대대장 김일성 대위. 43년 9월 내가 처음 만난 김일성이 하바로프스크 88특별독립저격여단(약칭ㆍ88여단)에서 점하고 있었던 위치는 이같은 직책과 계급,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시 31세였던 김일성은 지휘관을 뜻하는 「영장」「사장」이나 혹은 「동지」라는 호칭으로 불렸고 장군이란 명칭이 사용되지 않았음도 물론이다.

88여단에 있던 60여명의 조선인중 계급상으로 가장 높았던 사람은 후에 북한 보건성 부상을 지낸 이동화 여단군의소장(소좌)이었다. 제4대대장 강건(전북한 총참모장)ㆍ여단정치 지도원 최용건(전부주석)ㆍ대대정치위원 김책(전전선사령관)ㆍ안길(전총참모장)등은 김일성과 같이 대위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휘하에 가장 많은 조선인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지휘관인 탓으로 조선인의 구심적 역할을 했다.

특히 김일성은 만주 동북 항일연군 시절 생사를 같이하며 항일투쟁을 했던 25명의 빨치산 출신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이들 빨치산 출신들의 개인이력을 잠시 소개해야 겠다. 왜냐하면 이들은 나중에 북한으로 돌아간 뒤 모든 경쟁세력을 물리치고 김일성 정권을 수립하는 친위부대가 되고 일부는 현재도 권력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최용건은 중국 황포 군관학교 교관출신의 정통파 군인으로 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1920년대부터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는 투쟁경력면에서 김일성의 선배격이지만 88여단에서는 서로 격의 없이 친하게 지냈다.

김책 역시 만주에서 화려한 투쟁경력을 가졌던 인물로 군사전략보다는 정치조직 사업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김책도 김일성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6ㆍ25개전 당시 전선사령관 재임중 51년 1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강건은 군사전술에 뛰어난 인물로 88여단에서 김일성보다 더 소련인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소련인의 명령에 절대복종했으며 일외는 한눈을 팔줄 모르는 전형적 군인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해방후 88여단이 해체된 뒤에도 동북만주에 남아 활동하다가 46년 뒤늦게 제2대 인민군 총참모장으로 귀국,6ㆍ25전쟁의 주역이 된다. 그는 강성산 전정무원총리의 아버지이다.

1대대 정치중대장 최현은 계급은 낮았지만 김일성과 반말을 주고 받는 사이였다. 그것은 최현이 만주에서 오랫동안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기 때문인데 그는 정규교육을 전혀 못받았지만 상식이 풍부하고 중국어가 유창해 소련 공산당사를 부대원들에게 교육시키곤 했다.

안길은 목사 출신으로 공작원에게 포섭돼 만주에서 김일성의 빨치산에 합류한 이색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목사답게 성격이 온순하고 친화력이 있었으며 궂은 일도 마다 않는 서민적 행동으로 김일성도 그를 어렵게 대했다.

대대정치지도원 서철은 중국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학력이 변변치 못했던 빨치산 출신중에서는 가장 고학력자였다.

그는 초기에는 조선인중 지도자로 꼽혔으나 점차 김일성에게 그 지위를 뺏겨 김일성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북한에 돌아가서는 김일성의 신임을 얻어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지냈고 정치국원으로 있다 은퇴했다.

현재 북한 부주석인 박성철에게는 88여단 시절은 수치스러운 과거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당시 소대장이었던 박은 어느날 소만국경의 일본군 배치현황을 정찰 보고하라는 임무를 받고 떠났다. 박은 1주일의 작전기한을 훨씬 넘기면서 매우 중요한 군사정보를 무전으로 보내왔다. 그러나 확인결과 이 정보는 허위로 밝혀졌고 박은 장교에서 사병으로 강등됐는데 수치심을 느낀 박은 아편을 먹고 자살소동까지 벌였다고 한다.

1대대 1중대장이었던 최용진도 되새기기도 싫은 일화를 갖고 있었다. 성격이 과격했던 최는 역시 빨치산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일경에 붙잡혀 변절했다는 이유로 빨치산 재판에서 총살선고를 받게 되자 자신이 직접 아버지를 사살했다고 한다. 그는 북한에서 군단장ㆍ민족보위부상ㆍ수산상을 역임했는데 지금은 중풍을 앓고 있다고 한다.

김일성의 전기를 쓴 것으로 유명한 임춘추는 빨치산으로서는 무능한 편에 속했지만 한문과 중국어가 뛰어났고 한의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그는 6ㆍ25때 동해안 방어사령관이었다가 작전에 실패,처벌을 받았는데 김일성 전기를 쓰면서 복권됐고 나중에 국가부주석까지 올라갔다.

현재 북한의 인민무력부장인 오진우는 당시 1대대 1소대 부소대장으로 나와는 친교가 없었고 성격이 매우 깐깐한 편이었다.

이밖에 당시 김일성 휘하에 있던 빨치산 출신과 그들이 북한에서 맡은 직위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한익수(전군총정치국장) ▲전문섭(현인민무력부 부부장) ▲김경석(전평양시 당위원장) ▲김익현(현인민무력부 부부장) ▲이을설(현호위총국장) ▲이두익(현중앙군사위원) ▲조정철(현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김성국(〃) ▲김용연(〃) ▲이봉수(현출판지도국장) ▲황순희(현혁명박물관장) ▲태병렬(현조국해방박물관장)

만주 산악지대에서 무수히 많은 사선을 넘으면서 함께 싸웠던 이들 빨치산 출신들은 그들만의 끈끈한 정과 동지의식으로 뭉쳐있었다.

이들에 비해 나를 비롯한 12명의 소련 출신들은 덤덤한 감정으로 김일성을 대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경리중대에 배치된 뒤 김일성의 러시아어 통역으로 활동했지만 개인적으로 자주 김일성을 접하는 편은 아니었다.

88여단에는 중국인이 많고 만주에 침투,첩보활동을 했기 때문에 모든 교육과 훈련은 중국어로 실시됐고 조선인끼리도 중국어로 대화하는 일이 많았다.

중국어를 모르는 소련인이나 조선인들은 러시아어로 별도 교육을 받았고 빨치산 출신들과 소련 출신들은 할 수 없이 조선어로 말을 했다.

당시 김일성은 2년여동안 소련생활을 한 탓으로 간단한 러시아어를 구사할줄 알았으며 이 때문에 통역은 크게 필요치 않았다.

나는 가끔 러시아 서적을 번역,김일성에게 주곤 했는데 지금도 「조선지리개관」이란 소책자를 정성스레 번역하던 일이 생각난다.

내가 그렇듯이 우리 소련출신들은 해방후 김일성과 함께 북한으로 돌아가 북한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지만 빨치산 출신들과는 달리 모두 도중에 숙청을 당하거나 소련으로 쫓겨났다.

그만큼 김일성은 빨치산 출신들만을 절대적으로 신임했고 다른 사람들은 좀처럼 신뢰하지 않았다.

소련출신 12명중 유일하게 지금도 북한에 남아있는 인물은 인민무력부 부부장을 지낸 김봉률이다.

그는 소련에서 한 국영농장 책임자로 있다가 실적이 나빠 쫓겨난 뒤 88여단으로 배치됐다. 그는 88여단에서 일반병사로 근무했는데 인정이 많고 부대규율에도 잘 따르는 편이었다.

그는 해방직후 빨치산 출신인 김일이 신의주 당위원장을 할 때 그 밑에서 선전부장을 했는데 이때 김일에게 잘보인 탓으로 계속 김일성체제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88여단에서 통신대 소대장으로 나와 가까웠던 문일은 해방직후부터 오랫동안 김일성과의 부관을 지낸 측근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버림을 받아 소련으로 쫓겨갔다.

나 역시 인민군 창설을 주도하고 인민군 작전국장으로 6ㆍ25전쟁을 직접 치렀지만 59년 숙청때 계급과 당적을 박탈당하고 타슈켄트로 돌아가야 했다.

지난 5월 30년만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나는 6ㆍ25 당시 작전국장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기록돼 있는 것을 보았다.

김일성은 내가 젊은 시절 모든 정열을 바쳐 이룩한 과거 직위를 빼앗는 것도 모자라 나의 존재 자체를 북한역사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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