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삶과 문화] 녹색 서는 날

입력
2019.04.19 04:40
31면
0 0
서울의 한 초등학교 앞에서 ‘녹색어머니회’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등굣길 안전을 살피고 있다. 김주성 기자
서울의 한 초등학교 앞에서 ‘녹색어머니회’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등굣길 안전을 살피고 있다. 김주성 기자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여느 초등학생 학부모처럼 우리 부부에게도 일 년에 세 번, 아이들 등교 지도 의무가 부과됐다. 우리 부부는 누가 녹색 깃발을 들 것인가를 놓고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서로 눈치를 보느라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아내가 입을 열었다. 자신은 직장인이고 나는 시간이 자유로우니 내가 맡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녹색을 서면 한 명은 지각이고, 한 명은 지각이라는 게 아예 없으니, 지각이 없는 사람이 맡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다른 일 같았으면 내가 먼저 나서서 하겠다고 말했을 텐데 그렇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난 그때까지 녹색 조끼를 입은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여자들만 있는 곳에 가는 것은 참 곤혹스럽다. 녹색 깃발이 거의 내 손에 쥐어지기 직전, 난 회심의 카드를 꺼냈다.

“녹색어머니회잖아! 난 결코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불행히도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몇 년 전 ‘녹색어머니회’ 이름을 ‘녹색교통봉사대’로 바꾸었다. 회심의 카드는 개뿔. 난 순순히 신청란에 내 이름을 적었다. 뭐, 아마 이름이 바뀌지 않았어도 결국 내가 갔을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회’가 아닌 게 다행인 셈이 됐다. 못 갈 곳에 가는 것은 아니게 됐으니.

하지만 ‘녹색교통봉사대(약칭 녹색)’는 아직 아빠를 맞을 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내가 처음 학교에 등장한 날, 다른 엄마들은 흠칫 놀랬다. 그리고 분명 신청서에 내 이름을 적어놓았는데, 학교에서는 친철하게도 내 이름을 아내 이름으로 바꿔놓았다. 난 녹색을 설 때마다 아내의 이름 옆에 사인을 한다. 이런 종류의 일은 육아를 많이 하는 나에게 늘 있었던 일이다.

아내의 출산휴가가 끝나고 아이가 생후 3개월이 됐을 때, 당시 직장생활을 하던 나는 1년 동안 육아휴직을 했다. 지금이야 육아휴직을 하는 아빠들이 좀 늘어났지만, 내가 육아휴직을 했던 2011년만 하더라도 전체 육아휴직자의 2.4%, 1,402명만이 아빠였다. 평일 낮에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 산책이라도 할라치면 엄마들이 힐끗힐끗 쳐다보곤 했다. 외출해서 아이에게 젖병을 물려야 할 때도 대부분의 수유실은 남자 출입금지였다. 동네 근처의 공영 수영장에서 아이와 부모가 함께 수영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알아봤더니, 프로그램 이름이 ‘모자수영’이었다. ‘부자’가 가기 꺼려졌다. 우리 아이 학교는 바뀌었지만, 아직도 많은 학교에서는 ‘녹색어머니회’다. 예전에 비하면 육아가 남녀 모두의 일이라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 주된 육아는 여자의 몫으로 여겨지고 있고,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런 흔적은 특정 프로그램의 이름이나 자격 제한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남녀가 공평하게 육아를 ‘하는’ 부부들의 인식 속에도 남아 있다.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1년간의 육아휴직은 나에게 일종의 훈장이 되었다. 아내는 아직도 나의 육아휴직 시절을 이야기할 때면 미안해한다. 난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속으로 난 괜찮은 놈이라는 우쭐한 마음이 드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아내도 나와 똑같이 1년의 육아휴직을 했음에도 말이다. 나뿐만 아니라 육아휴직을 했던 남자들은 여자들 앞에서 자신의 선택과 경험을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육아휴직을 했다고 으스대는 엄마들을 본 적은 없다.

며칠 전 녹색을 서러 학교에 갔을 때, 녹색 조끼를 입고 자랑스럽게 셀카를 찍었다. 그 모습을 본 녹색대장님이 웃으며 한 말씀 하신다. “아빠들은 녹색 서면 꼭 사진을 찍더라고요.”

꽤 성평등 의식이 높을 녹색 서는 아빠들. 하지만 나를 포함한 그런 아빠들에게도, 엄마들에게는 당연한 일인 녹색을 서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최성용 도시생태 작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