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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낙태와 우생학

입력
2019.04.16 18:00
수정
2019.04.16 18:4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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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예방접종을 시행하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자궁의 나팔관 절제도 강제할 수 있다. 타락한 자손이 범죄를 저질러 처형되거나 저능함 때문에 굶어죽게 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명백하게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출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회에 더 유익하다. 따라서 3대가 모두 낮은 지능을 가졌으므로 불임 수술의 근거는 충분하다.” 1927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악명 높은 ‘벅 대 벨(Buck v. Bell)’ 사건에서 단종법(斷種法)에 대해 8대 1로 합헌 판결을 내렸을 때 제시된 다수의견이다. (‘완벽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 미국 버지니아주의 지적장애인 수용소 존 벨 소장은 17세 미혼모 캐리 벅에 강제불임 수술을 시도했고, 논란이 법정으로 옮아간 것이다. 정신지체자인 어머니를 둔 벅은 한 가정에 입양됐다가 성폭행당해 아이를 낳자 양부모가 수용소로 보내 버렸다. 여기서 3대가 저능하다는 의심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1907년 인디애나주에서 정신병 환자 등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을 허용하는 법을 채택한 이후 29개 주에서 강제 단종법을 채택했고,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의심을 받은 미국인 6만여명이 불임수술을 당했다.

□ 몇 년 후 독일에서는 우생학 숭배자인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했다. 히틀러는 1933년 권좌에 오른 뒤 단종법을 공포하고 수백만 명을 집단 학살했다.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도 우생학 신봉자였다. 그는 고교 졸업장이 없는 저소득층 여성이 불임수술을 받을 경우 아파트 계약금을 지원했다. 우생학이 저지른 만행의 사례들이다. 우리나라에도 모자보건법 14조에 흔적이 있다. 임신 24주 이내인 임신부가 본인 및 배우자가 우생학적 유전학적 정신질환 혹은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낙태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항이다.

□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저서에서 “우생학의 그림자는 유전공학과의 강화를 둘러싼 오늘날의 논쟁에도 드리워져 있다”고 했다. 유전공학 비판자들은 인간 복제, 강화, 맞춤 아기에 대한 욕구가 ‘민간화한’ 또는 ‘자유시장의’ 우생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유전공학 옹호자들은 자유롭게 결정한 유전학적 선택에는 강제성이 배제돼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우리 형법의 낙태 처벌조항이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다. 응당 환영할 일이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으니 관련법 개정 때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조재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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