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기억할 오늘] 냉전의 설계자 딘 애치슨(4.11)

입력
2019.04.11 04:40
30면
0 0
1949년 외교적 격동기의 미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은 냉전의 밑그림을 그린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1949년 외교적 격동기의 미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은 냉전의 밑그림을 그린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딘 애치슨(Dean Achesonㆍ1893.4.11~1971.10.12)은 미국 극동 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이른바 ‘애치슨 라인’ 선언으로 한국과는 썩 좋은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그는 전후 냉전 체제의 거푸집을 만든 거물 정치인이다.

예대와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그는 골수 민주당원으로,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의 재무 차관으로 입각해 뉴딜 정책 입안에 기여했고, 2차 대전 중 국무부와 국방부를 거치며 전후 유럽 부흥계획인 마셜 플랜에도 간여했다. 특히 49년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 장관으로서 유럽(그리스와 터키)의 대 소비에트 방어를 골자로 한 트루먼 독트린의 밑그림을 그렸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출범에도 주도적으로 개입했다.

외교사의 1949년은 극단적인 해였다. 그해 러시아가 핵 실험에 성공했고 중국이 공산화했다. 그 수세기(守勢期)의 국무 장관이면서도 동시에 그는 야당인 공화당의 공세 특히 조지프 매카시의 ‘빨갱이 사냥’의 주요 타깃이었다. 당시 매카시는 애치슨을 국무부 내 ‘진성(Card-Carrying) 공산주의자들의 보호자’라 불렀고, “엉터리 영국식 억양이나 흉내 내면서 젠체하는 외교관”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 애치슨도 외교관답지 않은 신랄한 어투로 악명 높았다. 그는 마셜 플랜 등에 반대하는 공화당 의원들을 ‘재검사자(re-examinist)’라 불렀다. “자기가 심은 농작물이 얼마나 자랐는지 매일 아침 뽑아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농부”라는 의미였다.

1950년 1월 12일 미국신문기자협회 초청으로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행한 ‘아시아의 위기’란 제목의 연설에서 그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동북아 지역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선이라고 발표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닦달에 초대 주미 대사였던 장면이 윌리엄 버터워스(William Butterworth) 당시 미 국무부 북동아시아담당 차관보에게 달려가 진의를 묻고, 한국 외무 장관이 주미 대사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보름 뒤인 1월 26일 한미원조 및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고 2월 10일 미 의회가 비준하면서, 한국 정부도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애치슨 선언이 소련ㆍ중국과 북한을 자극해 5개월 뒤의 도발로 이어졌다는 설이 있다.

최윤필 선임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