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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위니 만델라(4.2)

입력
2019.04.02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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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니 만델라가 1년 전 오늘 별세했다. 1986년 1월의 위니. AP 연합뉴스
위니 만델라가 1년 전 오늘 별세했다. 1986년 1월의 위니. AP 연합뉴스

남아공 반(反) 아파르트헤이트의 가장 전투적이고, 선동적인 리더 중 한 명이던 위니 마디키젤라 만델라(Winnie Madikizela-Mandela, 1936~2018)가 1년 전 오늘 만 82세로 별세했다. 그는 넬슨 만델라(1918~2013)의 두 번째 부인이다.

넬슨 만델라를 처음 만난 1957년 무렵 그는 백인 정부와 인종 차별에 강한 적개심과 분노를 품고 있던 21세 무명의 사회복지사였다. 당시 이미 유명한 변호사이자 반차별 운동가였던 넬슨은 그에겐 아득한 존재였다. 데이트를 청하는 넬슨의 첫 전화를 받고 그는 긴장감에 몸이 굳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나이도 훨씬 많고, 내가 다닌 사회복지학교의 후원자로서 공식 문서에 이름으로만 존재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58년 위니와 결혼하기 전 첫 부인 에블린 마세와 이혼했다.

결혼 3년째인 1960년 ‘샤퍼빌 학살’ 이후 넬슨은 사실상 도피생활을 시작, 62년 체포돼 64년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위니는 넬슨과 낳은 두 딸을 키우며, 넬슨의 석방운동을 벌이며 그의 정치적 역할을 이어 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영향력이 커진 뒤부터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내부 권력투쟁도 치러야 했다. 그는 여러 차례 투옥과 고문 연금 추방 등을 겪었고, 1년 넘게 살인적인 환경의 독방에 갇히기도 했다.

그가 테러를 서슴지 않을 만큼 난폭해진 건 1980년대 중반 이후였다. 사실상 사설 테러집단인 ‘만델라 유나이티드 풋볼클럽’을 앞세워 조직 내 밀고자나 경찰 협력자들을 상대로 테러를 자행했고, 희생자 중에는 14세 소년도 있었다. 기름 채운 고무튜브를 목에 감은 뒤 불을 붙여 살해하는 ‘네클리(Neck-lace)’란 처형법을 공개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우리가 가진 거라곤 돌과 성냥과 석유밖에 없다. 그것만으로라도, 우리는 이 나라를 해방시켜야 한다.”

그는 1990년 2월 석방된 넬슨과 2년 만에 별거, 96년 이혼했다. 그리고 넬슨 정부하에서 폭력과 살인교사, 공금횡령 등 혐의로 기소돼 벌금과 실형을 살았고, 데즈먼드 투투 주교의 진실화해위원회 심판대에 서기도 했다. 그는 “나는 만델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나는 만델라의 작품(product)이 아니라, 이 나라 대중과 내 적들의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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