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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하노이 ‘노딜’에도 마이웨이하는 문재인정부

입력
2019.03.19 19: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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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4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2019년도 제1차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에서 회의를 개회하는 의사봉을 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2019년도 제1차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에서 회의를 개회하는 의사봉을 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살얼음판 위를 걸을 때 빠지지 않으려면 속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지난해 4월 남북 정상회담 당시 판문점 평화의집 환담장에서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했던 말이다. 축지법을 쓰는 것도 아니고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싶지만, 돌이켜보면 일리가 있다.

2017년 북한의 6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발사가 촉발한 한반도 전쟁 위기에서 비핵화 협상 국면으로 넘어오기까지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처럼 당시에는 담대함과 속도가 해법이었을 것 같다. 실제로 전격적인 판문점 회담 두 달 뒤 북미 정상이 싱가포르에서 처음 만났고, 문재인 대통령은 그로부터 석 달 뒤 능라도 경기장의 15만 평양 시민 앞에 섰다. 그렇게 해서 견인해낸 것이 지난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다.

하지만 ‘노딜’(No Deal)로 끝난 하노이 이전과 이후가 같을 수는 없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체제 보위의 보검(寶劍)이라는 핵무기를 섣불리 내려놓지 않을 것이라는 보수 쪽 의심을 강화시켜 준 게 하노이 회담이다. 굳이 태극기부대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일반 국민 역시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순도 99.9%가 아니라는 게 하노이 회담 이후 가장 큰 상황 변화다.

문제는 빈손으로 끝난 하노이 이후에도 정부의 복기와 교정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담 결렬 후 가진 3·1절 기념사에서 문 대통령은 신한반도체제 구상을 발표하며 마이웨이를 선언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방안을 미국과 협의하겠다고도 했다. 대통령이 방향을 제시하니 외교안보 장관들이 다른 목소리를 낼 리 만무하다. 사흘 뒤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보고된 대책은 제재의 틀 내에서 남북 경협 재개 방안을 찾겠다는 하나마나 한 얘기였다. 제재의 틀 내에서 가능한 묘책이 있었다면 진작 나왔어야 한다.

되돌아보면 남북관계에서 문재인정부의 과속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진작부터 있었다. 지난해에는 문 대통령이 유럽 순방 도중 국제사회의 제재 완화를 요구했다가 냉담한 거절에 직면했다. 이번 하노이 회담 당일에는 마치 평시처럼 청와대 외교안보실 인사가 단행됐고, 결렬 선언 30분 전까지도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남북관계의 장밋빛 청사진을 거론했다.

물론 정부 설명대로 하노이 회담에서 영변 핵 시설의 완전한 폐기와 부분적인 대북 제재의 해제, 그리고 북한 내 미국 연락사무소의 설치가 논의된 것 자체가 진전이긴 하다. 여전히 북미 정상이 상대방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고 대화 지속 의사를 밝힌 것도 다행이다. 하지만 이번 회담을 통해 비핵화 회의론이 커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변화다. 지금 국민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문재인정부가 기존에 달려가던 속도에 못 이겨 제때 방향 전환을 못하거나, 북한에 대한 근거 없는 환상으로 달라진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 이니셔티브는 현 정부의 정체성인데 속도조절은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집권여당이 총선에서 180석 확보를 자신했다가 150석을 얻으면 패배라고 선언하고, 120석밖에 못 얻는다고 읍소했다가 운 좋게 150석을 얻으면 승리라고 평하는 게 여론의 생리다. 결국은 똑같은 150석을 얻어도 평가는 천양지차일 수 있다는 얘기다. 비핵화는 하루 아침에 찾아오는 ‘밝은 미래’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기대수준을 낮추는 메시지 관리와 속도조절을 하는 운영의 노련함이 필요하다.

하노이 이후 문재인정부가 새겨들으면 좋을 경구가 있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나오는 ‘여혜약동섭천(與兮若冬涉川), 유혜약외사린(猶兮若畏四隣)’이다. 조심하기를 의심 많은 코끼리가 겨울에 언 내를 건너듯 하고, 신중하기를 겁 많은 원숭이가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하라는 의미다. 정약용이 당호 여유당(與猶堂)을 여기서 따왔다고 한다. 조금 더딜지언정 국민과 뜻을 모아 가는 게 정도(正道)다.

김영화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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