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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나폴레옹의 귀환(3.20)

입력
2019.03.20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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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5월의 나폴레옹의 처지를 묘사한 작자 미상의 그림. 프랑스의회도서관 소장. wikipedia.org
1814년 5월의 나폴레옹의 처지를 묘사한 작자 미상의 그림. 프랑스의회도서관 소장. wikipedia.org

나폴레옹이 유배지 엘바(Elba) 섬을 ‘탈출’해 파리에 입성한 날(1815.3.20)부터 워털루 전쟁에서 패해 다시 폐위(7월 8일)되기까지의 이른바 ‘100일 천하’는 신화의 대미로선 손색 없는 이야기지만, 사실 ‘탈출’이란 표현은 과장이다. 조약상 그의 신분은 엘바의 영주였지 죄수가 아니었다.

유럽을 제패한 프랑스 제1제국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가 러시아 원정과 유럽 동맹군과의 전쟁에 잇달아 패해 1814년 4월 유럽동맹군과 ‘퐁텐블로 조약’을 맺었다. 프랑스 황제 자리를 루이 18세에게 양위하고 그는 지중해의 섬 엘바로 거처를 옮긴다는 게 골자였다. 프랑스 남쪽 260km 이탈리아 해안에서는 불과 10km 떨어진, 둘레 약 100km에 인구 1만2,000명의 작은 섬이지만, 그래도 나폴레옹은 영주였다. 조약상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의 안정적 섬 정착ㆍ통치를 위해 연 200만파운드를 지급해야 했다.

1814년 5월 3일 엘바에 상륙한 나폴레옹은 궁과 부속 건물을 짓고, 독자적인 깃발을 만들고, 도로를 넓히고, 요새를 짓고, 상비군을 조직하고, 적으나마 해군도 창설했다. 그는 조약상 신변 경호 등 목적의 군인 400명을 둘 수 있었다.

전 유럽을 경영한 그에게 그 영지는 물론 답답했을 것이다. 그나마 그의 군대와 국가시스템은 자립적인 게 아니었고, 루이 18세는 정착 지원금을 보태 줄 생각이 없었다. 그 결과가 ‘탈출’이었다. 그는 영국 상선으로 위장한 300톤급 범선 ‘인콘스탄트’를 주력함으로 몇 척의 배를 보태 2월 26일 엘바섬을 떠났다. 조약 어디에도 그가 엘바에 머물러야 한다는 조항은 없었고, 그는 독립 군주로서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었다. 다만 유럽 군주들은 그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그가 상륙한 이탈리아는 그에게 비자를 발급한 적이 없었다. 당시 그에겐 1,150명의 군대가 있었다.

조약 체결 당시부터 그가 엘바에 뼈를 묻을 생각은 없었으리란 게 정설이다. 루이 18세의 퇴행적 체제는 길어야 6개월도 못 버틸 것이고, 프랑스 시민들은 다시 자신을 찾으리라는 게 나폴레옹의 예상이었다고 한다. 그 예상은 적중했지만, 이후의 전황은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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